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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이 가고, 오월이 와도 숨쉬기가 편치 않다. 최근 한국소설계에 유독 참사와 재앙, 애도의 서사가 많이 생산되는 이유를 묻는 일은 무의미하다.

김애란의 단편 ‘물속 골리앗’은 이렇게 시작한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비행운>, 창비) 이 소설은 철거의 폭력과 공포에 내몰린 재개발 공간과 한 달째 쏟아지는 폭우 상황에 고립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애란의 또 다른 단편 ‘하루의 축’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기옥씨는 입을 크게 벌려 과자를 반쯤 베어 물었다. 처음에는 ‘아유 달어’ 하고 살짝 몸서리쳤지만, 곧 프랑스 전통 과자의 그윽하고 깊은 단맛, 부드럽고 바삭한 식감을 조심스레 음미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기옥씨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 기옥씨는 왠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지막하게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단가…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비행운>, 창비)

김애란 작가 _경향DB

너무 달콤해서 소설의 화자 기옥씨를 몸서리치게 만든 것은 프랑스 전통 과자 마카롱이다. 기옥씨는 누구인가? 공항의 일용직 잡부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신산한 삶에 처해 있다. 이런 기옥씨의 일터에 누군가 ‘스무 가지가 넘는 색깔의 신선한 마카롱’을 놓고 간 것이다. 한 입 베어 문 마카롱은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기옥씨의 고달픔을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달콤하다. 기옥씨로서는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상할 수 없는 맛이다. 넋을 쏙 빼가듯 기옥씨의 미각을 사로잡은 달콤함은 독자에게 전달되면서 처절함으로, 이어 처연함으로 바뀐다.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김애란이라는 젊은 작가의 문장, 문장 속에 담긴 의식, 의식 속에 새겨진 세계(작품)을 엿보면 된다. 그녀가 호출해낸 인물들의 존재 방식은 2010년대 전후 한국 사회의 민낯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작가란, 그저 재미를 추구하는 오락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맥락 속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질문과 흘러가는 시간에 맞서는 예술의 의미를 소설을 통해 던지는 존재이다. 뭇사람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어긋나고 응어리진 현실을 풀어주고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작가이고, 소설이다.

작가에게는 영매(靈媒)의 역할이, 소설에는 치유의 기능이 내재되어 있다. 여름의 문턱에서, 안부를 묻듯, 김애란의 소설 한자락 건네본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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