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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낭보를 들었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본이 영국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강의 수상 소식은, 가치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한국 소설의 존재감과 번역 작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안겨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상작 <채식주의자>는 3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집이다. 한국문학계에서 소설가가 1년에 문예지에 발표하는 단편소설의 최대치는 4편 정도, 대개는 2편 내외, 중편은 1편 정도이다. 소설가가 쉬지 않고 성실하게 작품을 쓰고 발표해서 한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기까지는 3년 내외의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2004년 중편 <채식주의자>를 시작으로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 문예지에 발표됐고, 2007년 한 권으로 출간됐다.

소설은 자본주의에 적합한 속성을 지닌 문학 장르이다. 사상과 예술을 담는 고유한 서사 양식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상품으로서의 영향력이 크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소설, 그러니까 세계 소설 시장에서의 소설이란 대개 장편소설을 지칭한다. 한국 작가들은 그동안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에 치중해왔다. 신인 시절 단편 창작을 통해 문장력을 연마한 뒤, 중편과 장편으로의 확장을 도모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한류의 흐름 속에 세계 소설 시장을 겨냥해 장편소설이 독려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17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시민이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_ 경향DB

소설가마다 세상을 표현하는 서사 감각과 호흡의 길이가 다르다. 소설가의 개인차뿐만 아니라 언어와 국가적 특성차를 고려해야 한다. 단편 미학에 적합한 소설가와 중편 양식에서 기량이 발휘되는 소설가가 따로 있다. 장편에서도 서사의 호흡과 규모에 따라 경장편과 장편, 대하장편으로 달라진다. 단편 작가로 오정희와 앨리스 먼로, 레이먼드 카버를 들 수 있고, 장편 작가로 천명관과 오르한 파묵, 대하장편 작가로 박경리와 레프 톨스토이 등을 들 수 있다. 중단편과 장편을 고루 운용하는 작가로는 황석영과 성석제 등이 있다.

21세기 인터넷 매체 환경이 보편화되면서 한 인간의 삶을 묵직하게 그려낸 중편 장르는 소멸되는 듯하다가 경장편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이행되고 있다.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비롯,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 등은 중편과 경장편 양식을 겸하고 있다. 철학적인 사유 속에 시적인 문장들이 돋보이는 카뮈의 <이방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등이 같은 계열이다.

한강은 시인으로 데뷔해 소설에 집중해왔다. 시적인 감수성과 서정이 잡식의 힘센 소설 장르와 경합을 벌이면서 독특한 긴장과 여운을 창출해왔다.

소설가의 삶이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지난한 작업의 연속이다. 한 편의 소설이 세상에 떨치는 가치는 현재와 미래, 무한대로 열려 있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출발점으로 그동안 축적해온 다양한 개성의 한국 소설들이 세계 독자와 유쾌하게 만나리라 기대한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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