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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작가에게 모국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새삼 제기한다. 식민지나 이민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를 부모로 두었거나 직접 체험한 작가들의 경우, 언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북대서양의 섬나라 아일랜드는 800년 가까이 잉글랜드의 식민지배를 받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일랜드 작가들의 경우, 민족어이자 모국어인 게일어가 아닌 식민지 제국 언어인 영어로 글을 써야 했고, 자국 문학사가 아닌 영국 문학사의 일원으로 세계 독자에게 소개되어 왔다.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등이 그들이다.

조이스는 식민지 조국으로부터 스스로 유배의 길을 택해 문학을 조국으로 삼아 유럽 각국을 전전하며 소설 쓰기에 투신했다. 그 여정에 생산한 <율리시스>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독보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는 식민지 역사로 점철된 슬픈 아일랜드 출신 작가지만, 그들을 삼킨 ‘대영제국’이 국보로 여기는 셰익스피어가 평생 구사한 2만 단어를 능가하는 4만 단어 이상을 <율리시스>에 자유자재로 부려놓음으로써 식민지 언어 사용자로서의 한계를 통쾌하게 벗어던지는 아이로니컬한 장관을 연출했다.

고도를 기다리며_제공


조이스와 같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프랑스에 귀화해 이중 언어 사용자로 작품 활동을 했다. 기존의 언어관을 전복시키는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롯해 소설과 희곡들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썼고, 그것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또 다른 부조리극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도 베케트처럼 이중 언어 사용자였다. 그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프랑스에서, 청년기를 루마니아에서 보낸 뒤, 프랑스에 귀화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높였다. 이들은 정주(定住)를 거부하며 예술사를 빛낸 20세기의 이방인들이다. 이들의 새로운 일원으로 줌파 라히리를 놓을 수 있다.

줌파 라히리는 인도 벵골 출신의 부모 슬하에서 미 동부에서 성장했고, 영어를 모국어로 교육받았다. 보스턴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처음 소설을 접한 그녀는 이민자 가정의 현실을 진솔하고 담담한 문체로 쓰기 시작했고,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등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소설 창작과 더불어 르네상스 연구를 20년 넘게 지속해온 줌파 라히리는 현재 로마에서 살고 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첫 책이다. 21편의 산문과 2편의 짧은 소설로 이루어진 얇고 단정한 책은 작가에게 모국어란 무엇인가, 곧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그녀가 작가로서의 명성과 권위를 안겨준 주된 언어인 영어와 모든 것이 영예롭게 주어지는 미국의 삶을 내려놓고, 로마로 옮기면서 밝힌 이유는 단 하나다. ‘창작자에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순간순간 뻗어나가는 봄의 생명력만큼이나 21세기 이방인 줌파 라히리의 작가적 모험이 신선하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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