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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의 피해자가 되게 하고 있다.”

최근 만난 새누리당 중진의원의 말이다. 무슨 객쩍은 소리냐 싶었지만, 이어지는 말에서 나름의 통찰과 자조가 섞인 ‘역설적 진단’이라는 걸 알게 됐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지난 2년여간 국정운영 방식을 바꾸라는 요구에 수차례 직면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게 그의 평가였다. 이유가 뭘까. “바뀔 기회를 국민들이 주지 않는다. 지난해 7·30 재·보궐선거가 기회였는데 그때도 (여당이) 이겼고, 이번 4·29 재·보선도 그랬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세월호 참사, 성완종 리스트 등 잇달아 터져나오는 국정 난맥상에도 박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지는 일은 없었다.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치러진 재·보선은 모두 여당이 승리했다. 그러다보니 ‘변화’는 그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시늉’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변했다고 할 만한 게 있다. ‘와병’에서 일주일 만에 돌아온 박 대통령은 달라졌다. ‘국민에게 해야 할 도리를 하지 않는’ 여야 정치권에 대한 준엄한 질타와 압박. 와병 전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하긴 와병 중에 치러진 4·29 재·보선은 새누리당의 압승, 새정치민주연합의 완패로 끝났다. 국민이 ‘면죄부’를 준 걸로 봐야 하지 않겠나. 실제 박 대통령은 재·보선 결과를 “국민의 준엄한 명령”이라고 했다. 그러고선 “국민의 눈높이” “국민을 위한” 등의 수식어를 붙이면서 정치권에 호소하고, “하~” 하고 ‘한숨’까지 쉬었다. 이런 대통령에게 누가 ‘염치없이’ 대거리를 하겠나.

‘대통령이 역사의 피해자’라는 역설은 여기서 성립한다. 국정에 무한책임을 지는 대통령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변화할 결정적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다보니 오히려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집권 3년차가 되도록 박 대통령이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한탄들이 여권에서도 나오고 있다. ‘창조경제’ ‘통일대박’ ‘4대 개혁’ ‘부패 척결’ 등 구호의 홍수 속에 뭘 하자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순방이 잦길래 그나마 잘하는 줄 알았던 외교 분야도 최근 한반도 주변 정세의 급변 속에 전략 부재를 비판받고 있다. 총리 공백 사태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관심권 밖이다.

이런데도 대통령은 국정운영과 국민통합의 능력을 보여주기보다 정치권, 나아가 국민을 갈라치기하면서 정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런 박 대통령이 역사에 어떤 대통령으로 남을 것인지 이 의원은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진단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는 “우리는 그래도 계속 이길 거다”라고도 말했다. “강력한 야당이 있을 때 나라가 잘된다”고도 했다. 여권 인사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대통령이 걱정이지만, 야당이 더 걱정’이라는 레퍼토리다.

[장도리]2015년 4월 29일 (출처 : 경향DB)


국정이 무능과 무기력을 보이고, 대통령이 ‘역사의 피해자’가 될 기미가 보여도, 문제는 이를 견제할 야당이 없다는 데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재·보선 패배 이후 자중지란의 ‘끝판쇼’를 보여주면서 지지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 허탈감을 넘어 모욕감을 주고 있다. 기실 야당도 제대로 정치적 책임을 진 일이 없었다. 위기에 빠질 때마다 ‘회초리’와 ‘환골탈태’ ‘절체절명의 각오’를 앵무새처럼 반복했지만, ‘소나기’가 지나고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모습 그대로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곤 했다.

앞서 새누리당 의원의 논리를 따르면, 경중(輕重)의 차이는 있겠지만 책임론은 두 개다. 그런데 책임론의 대상인 둘 다 변화할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 역사는 진정한 ‘피해자’를 안은 채 흘러가고 있다.


김진우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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