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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의 싸움은 질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와의 싸움이자 질병의 확산이 불러오는 공포와의 싸움이다. 바이러스의 피해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감염자 또는 잠재적 감염자를 효율적으로 보호·격리하는 보건시스템적 대응, 바이러스 백신이나 치료제를 개발하는 의료기술적 대응, 불필요한 공포의 확산을 막고 시민이 차분하게 질병에 맞서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정치적 대응, 이 세 가지가 맞물려야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은 당대 의료기술 수준에 의해 한계가 지어진다. 메르스처럼 백신이나 치료제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바이러스가 있다. 이 경우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최소화하는 것,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요컨대 국가의 보건시스템과 정치의 문제이다. 두 가지 모두 신뢰가 바탕에 있어야 한다. 보건시스템적 대응이건 정치적 대응이건 시민의 신뢰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야 한다. 신뢰를 잃는 순간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이미 지는 것이다.

메르스와의 싸움에서 정부는 처참하게 패배했다. 보건당국의 메르스 확산 방지조치는 엉망진창이었음이 드러났다. 최초 감염자와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사람을 조기에 파악하지 못해 바이러스가 전국 각지로 퍼졌다. 그나마 확인된 접촉자의 격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바이러스에 감염된 한 의사는 1500여명이 모인 행사에 참석했고, 다른 감염자는 1시간30분 동안 다른 승객들과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만약 행사장이나 시외버스에서 3차 감염이 이뤄졌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3차 감염자(들)의 생활 동선과, 그 동선 상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 동선에 따라 접촉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000명이 넘는 다른 자가 격리자들의 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다른 사람과 접촉한 사례가 속출하면 사태는 그야말로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진다.

2차 감염자가 발생했을 때 보건당국은 3차 감염자는 없다고 했다. 3차 감염자가 발생한 뒤에는 “모두 병원 내 감염이며, 지역사회 감염은 없다”고 안심시켰다. 감염자와 함께한 행사장이나 버스에서 3차 감염자가 발생하면 그때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게 상식일 터인데, 보건당국은 최선을 가정했다가 상황이 악화되면 속절없이 끌려가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시민들이 보건당국을 신뢰한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보건당국에 대한 시민의 신뢰는 붕괴됐다. 괴담이 난무하고, 공포는 바이러스처럼 퍼졌다. 투명한 정보 공개와 소통으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해야 할 이 때, 질병관리본부는 도리어 트위터 계정을 닫아버렸다.

5일 메르스 발원지로 알려진 경기도 평택성모병원은 인적이 끊어진채 굳게 문을 닫고 있다. (출처 : 경향DB)


국가적 재난의 극복은 대통령의 첫째 소임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지 보름이 지나서야 점검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도 남 일 말하듯 하는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으로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여당 지도부가 제안한 당·정·청 협의도 거부했다. 야당과 국회법 개정안에 합의한 데 대한 불만 때문이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 박 대통령은, 보수언론이 즐겨 하는 표현대로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메르스 확산 국면에서 정부가 취한 선제적 대응이라고는 ‘유언비어 엄벌’ 방침밖에 없다.

메르스 사태로 한국은 국제적 망신거리로 전락했다. 가게는 텅텅 비었고, 중국인을 비롯한 관광객은 급감했다. 이 정권이 말하기 좋아하는 ‘국격’은 곤두박질쳤고, 경제에는 적신호가 켜졌다. 서울 강남구가 ‘메르스 괴담’의 직격탄을 맞은 것을 보면 이 정권이 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이익은 고사하고 우파적 가치와 핵심 지지층을 보호할 능력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이쯤 되면 시민들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박 대통령은 국가를 운영할 최소한의 능력이 있는가.


정제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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