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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나이 든 동네인 줄 알았던 을지로에 다시 시간이 흐른다. 색 바랜 골목길 사이로 청년들이 스며들면서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셔터가 내려진 빈집에 청년 예술가들이 자리를 잡았고, 그들의 아지트 옆으로 카페들도 생겨났다.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묘하게 뒤섞인 을지로는 지금 가장 ‘뜨는’ 동네다.

을지로의 옛 이름은 구릿빛 진흙이 많은 땅, ‘구리개’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황금정(黃金町)으로 부르다가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말로 변경할 때 지금의 을지로란 이름이 붙여졌다. 1930년대 이 일대는 일본인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일제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촌, 남쪽은 남촌이라 불렀다. 일본인 거주지인 남촌은 일본을 거쳐 온 서양의 신문화가 조선에 등장하는 주 무대였다. 양복을 입고 ‘딴스홀’을 출입하던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은 ‘퇴폐의 상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한국의 근대 문학이 싹튼 곳도 바로 여기다. 당시 ‘오갑빠’(앞머리를 일직선으로 자른 머리) 스타일의 구보 박태원이 막역한 사이였던 봉두난발의 이상과 함께 황금정 일대를 활보하곤 했다. 이상이 신혼살림을 차린 허름한 셋집도 이곳에 있었다.

을지로가 일제 때 금융과 쇼핑의 중심지였다면, 1970~1980년대는 철공소와 인쇄소 등이 밀집한 ‘제조업의 메카’였다. 하지만 1990년대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활력을 잃었다. 을지로가 도시의 주변부로 숨어든 것도 이 무렵부터다. 쇠퇴해가던 을지로는 2~3년 전 청년 예술가들이 들어오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허름하지만 비밀 같은 공간을 찾아 저녁이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잊혀진 공간 을지로를 사람들이 다시 찾는 이유는 뭘까? <다시, 을지로>의 저자 김미경은 ‘공존’을 꼽는다. 과거와 현재, 새로 골목에 입성한 청년들과 오랫동안 이 골목을 지켜온 가게 사장님들과의 공존. 청년 예술가들에게 빈집을 내어주고 임차료를 지원하는 중구청의 정책도 한몫했다. 또 다른 이유는 공간이 주는 이점 때문이다. 이곳엔 한때 ‘도면만 있으면 탱크도 만들어준다’는 업체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어쩌면 을지로가 보여주는 공존이야말로 구도심을 살리는 도시재생의 모범답안에 근접한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 도시학자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자신들이 실제로 살지 않는 공간에 대한 계획과 개발은 ‘도시 재건축이 아니라 도시 약탈’이라고 말한다. 그가 소개한 일화는 이를 잘 설명한다. 뉴욕 이스트할렘 새로 정비된 저소득층 주택단지에 자리를 크게 차지한 잔디밭이 있었다. 지역 관계자들은 “이제 가난한 사람들도 누릴 거 다 누린다”며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정작 주민은 자신들의 집을 헐어 버리고 만든 잔디밭을 좋아하지 않았다. “누가 저게 필요하대요?”

그는 시 당국과 개발 관계자들이 지역 주민의 삶에 대해서 실제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개발’이나 ‘주거환경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엄청난 폭력을 휘둘렀다고 말한다. 그는 수십억달러를 들여 수립한 도시계획이 오히려 도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반복된다. 이는 도시재생 사업이 곳곳에서 진행 중인 서울에도 유효하다. 종로구 옥인동, 사직동 등은 재개발을 두고 여전히 찬반이 갈리는 곳들이다.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남기자는 건 아니다. 도시는 지자체, 도시계획가들이 아닌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얘기다.

제이콥스는 자신이 살았던 뉴욕 허드슨가의 일상을 발레에 비유했다. 도시는 무질서하지만 발레 공연처럼 각자 역할을 맡은 거리의 무용수들에 의해 움직인다는 의미다. 만약 도시의 거리를 걸어다닐 때 날마다 바뀌는 즉흥 발레를 볼 수 있다면 그 도시는 일상이 살아 있는 공간이다. 서울도 다시 발레를 추어야 할 때이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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