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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의혹 논란이 그 어느 때보다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논란의 당사자가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신경숙 작가여서 충격이 더 크고, 그만큼 안타까움도 깊다. 파문의 확산 과정을 보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이번 기회에 한국 문단의 고질병을 고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 때문이다. 시를 쓰는 지인은 “너무 낙관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부에선 누구나 알고 있다는 그 고질병을 고치지 않으면 한국 문단에는 아예 한 줌의 희망도 없다. 그래서 차라리 절박한 기대를 갖는다.
문단의 주체들은 이 기회에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은 문학에 외경심을 가진 독자의 신뢰를 되찾는 일이자, 문학을 꿈꾸는 이들의 희망을 박탈하지 않는 것이며, 문학의 존재 이유를 메말라가는 세상 속에서 확인하는 작업이다. 작가, 평론가, 문학출판계가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문단이 검찰의 수사를 반대하는 것도, 현택수 한국사회문제연구원장에게 고발 취하를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학의 일은 문학의 일로 다뤄야 한다”는 이응준 작가의 말이 맞다. 현택수 원장의 고발은 성급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주저주저하던 문단 주체들을 각성시키는 계기는 됐으리라 믿는다. 적어도 과거처럼 흐지부지 묻히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작가회의와 문화연대가 23일 여는 긴급 토론회를 기대한다. 문단이 자정능력을 보여주는 첫걸음은 내부의 문제점들을 공론의 장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작가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그동안 쉬쉬해오던 문단의 치부들, 구조적 문제들을 오롯이 짚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속으로 썩는 게 아니라, 밖으로 곪아터지는 것이야말로 고질병을 고칠 수 있는 단초이다. 더욱이 ‘문학의 죽음’이라 불리는 이 시대에 문단이 거듭나는 데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 구조적 문제들을 짚어냄으로써 패거리를 만들어 밀어주고 당겨가며, 견고한 상업화의 성을 쌓아 문단의 고질병이 된 ‘침묵의 카르텔’을 깨야 한다. 내부 부조리를 그저 술집에서의 한탄으로 배설해 자위할 게 아니라 공론의 장, 맑은 햇볕으로 끄집어내 소독한다는 의미다.
표절 의혹 논란을 불러 일으킨 소설가 신경숙 씨 (출처 : 경향DB)
우선 초심을 잃어버린 채 자본 축적과 독점화를 통해 권력화된 문학출판계를 살펴볼 일이다. ‘창비’ ‘문지’ ‘문학동네’로 대변되는 문학출판의 권력화가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상업화됐는지, 그로 인해 문단에 어떤 병폐를 만들었는지 분석해야 한다. 막강한 문예지를 펴내는 이들 출판사의 힘이 얼마나 강하길래 평론가들이 입바른 소리를 못하는지, 왜 많은 작가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지도 알아야 한다.
평론가들의 각성을 일궈내는 일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출판권력과 작가 사이에서 날 선 비평으로 문학의 바른길을 지켜내고 이끌어야 할 그들이 어떻게 문제의 한 축을 이루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비평의 죽음이 곧 문학의 죽음이란 것을 알면서도 ‘주례사 비평’을 쏟아내고, 표절을 검증해야 할 그들이 그동안 몇 번의 의혹 제기에도 왜 침묵했는지, 출판권력까지 비판해야 할 그들이 출판권력의 하수인이란 비판을 받는지도 들여다보자. 물론 출판권력에 ‘한 번 찍히면 문단에서 살아가기 힘들다’는 그들의 사정도 들어볼 일이다. 작가들이 자신의 윤리성을 스스로 돌아보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 번의 토론회로 구조적 문제가 개선될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양한 형식의 공론화 장을 만들어 문단이 거듭날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자칫하면 온갖 말과 글의 성찬으로 끝날 수도 있다. 누군가 ‘총대’를 메야 한다. 쏟아지는 말과 글들을, 자정의 힘을 조리있게 하나로 모으는 작업은 한국문학의 거듭남을 담보하는 일이다. 또한 부끄러운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문학의 주체 누구나 공감하고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을 만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유리 거울이 아니라 침묵의 카르텔보다 더 견고하고, 썩지도 깨지지도 않는 돌거울이다.
문단의 돌거울을 만들 자 누구 있는가. 슬며시 작가회의에 기대를 걸어본다. 그나마 한국 사회에서 문인들을 대표해 권력의 부정함, 사회의 부조리를 향해 쓴소리를 해온 게 작가회의 아닌가. 여기에 문학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원로들이 말이 아니라 몸으로 나서야 한다. 문학의 존재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가들, 평론가들도 이번에야말로 날카로운 분석으로 힘을 보태면 문단의 자정은 가능하다. 문단이 스스로 하지 못한다면 외부의 힘에 의해 거듭날 수밖에 없다.
도재기 |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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