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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과연 심리학에서 말하는 ‘망각의 역현상’인지, 어제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주제에 이십삼년 전 그날이 그린 듯 생생하다. 그날은 어버이날이었다. 4월26일 사복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의 시신이 모교 병원의 영안실에 안치된 후, 얼결에 투쟁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학교를 지키며 열이틀째 철야농성을 하던 불효녀에게는 쇳덩이를 삼킨 듯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당연한 일상을 영위하기엔 부당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강경대가 죽고 사흘 뒤에 전남대 박승희가 분신했다. 박승희가 죽고 이틀 뒤에 안동대 김영균이 분신했다. 김영균이 죽은 이틀 뒤에 경원대 천세용이 분신했다. 다시 사흘 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고 목숨을 끊은 이들은 모두 나와 엇비슷한 연배의 스물서넛 살, 죽음을 껴안기엔 아직 창창한 젊음이었다.


다른 삶, 나은 세상을 위해 죽음을 매개로 싸운다는 건 참혹한 모순이었다. 아무리 유구한 신화를 들추어 불과 물의 정화를 말해도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강경대를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칠 때마다 가슴에 절망의 검은 물이 배었다. 총학생회실에 비치된 팩시밀리는 사흘이 멀다 하고 ‘열사’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사진을 토해냈다. 그것들을 검은 테두리의 사진틀에 담아 도서관 앞에 마련한 분향소에 봉안했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어떻게 하면 이 불가해한 현실 속에서 그들을 ‘계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혼돈과 공포, 그해 5월의 ‘괴물’은 그 틈새를 음험하게 파고들었다.


구겨진 유인물과 쓰다만 플래카드가 쌓인 학생회실 한구석에서 집행부들과 조회를 하다가 비보를 들었다. 전민련 간사 김기설이 조금 전 로터리 건너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투신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적으로 나와 친구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어젯밤, 바로 몇 시간 전, 무슨 문건인가를 정리한다며 워드프로세서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를 보았던 것이다. 조금은 산만하고 우울해 보였던가? 아니, 우리 대부분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죽음을 준비하는 그의 깊은 고독을, 뒤이어 펼쳐질 비열한 날조극을.


처음에는 웃었다. 유서를 대필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 황당해서. 그런데 상황이 조금씩 기묘해졌다. 세 사람만 우겨대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낼 수 있다더니, 공안 검찰의 압박 공세와 권력의 확성기가 되어버린 언론의 여론몰이 속에 그 황당한 ‘썰’은 어느새 ‘사건’이 되어 ‘사실’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했다. 이미 네안데르탈인 시대부터 ‘슬픔의 의식’으로 자리 잡았던 한 인간의 죽음이 조롱당하고 왜곡되는 일은 그토록 짧은 시간, 지극히 추상적인 증거만으로 가능했다.



'유서대필 사건'의 당사자 강기훈씨가 무죄선고를 받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경향DB)



그 일은 언제부터인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지만, 음모의 본질을 “고발한다!”고 외쳤던 작가 에밀 졸라는 한국에 없었다. 하필이면 어린이날, 동심과 백만 광년의 거리가 있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옛 시인의 일갈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예언처럼 ‘검은 유령’이 사건을 장악했다. 김기설은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서강대 본관 5층 옥상에 올라가 시너를 몸에 뿌리고 라이터 불을 붙인 뒤 16미터 아래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자살방조죄’로 판결 난 그날의 사건은 한 사람의 인생을 산산조각냈고 다른 한 사람의 인생을 무참히 모욕했다. 전자는 그로부터 23년 동안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간난고초를 겪은 강기훈이요, 후자는 결국 결손가정 출신에 고등학교 중퇴자로서 스스로 ‘이타적 자살’을 할 자격조차 없다고 낙인찍힌 김기설이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서야 마침내 무죄 판결을 받고 기자회견을 하는 강기훈씨의 얼굴이 내게는 낯설다. 분노와 억울함으로 몸부림치던 청년은 잔인한 세월을 오직 진실에 의지해 견디는 동안 병든 초로의 오십객이 되었다. 그가 재판정에서 했던 최후진술 전문을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며 읽었다. 짐짓 담담한 문장의 행간에 꿍꿍 윽박은 23년의 분노와 슬픔과 회한이 숨 막히게 아팠다. 그의 소망대로 이제는 놓여나기를 빈다. 그는 말마따나 할 만큼 했다.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소박한 충고를, 상고니 뭐니 다시금 죄를 더하려는 이들이 부디 새겨듣길 바란다. 준엄한 시간의 법정은 누가 진정한 죄인인가를 마지막까지 판정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역사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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