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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장엄한 선언문처럼 <동의보감>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은 우주에서 가장 영귀한 존재이다.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의 형상을 닮은 것이고 발이 네모난 것은 땅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기침 안 하기도 힘들지만 주말을 지붕 아래에서 공글리기도 참 어렵다. 믿을 건 자유로운 공기 속의 계곡과 들판이다. 흐르는 물에 손을 씻고 길을 나설 때 <동의보감>의 저 첫대목이 떠오르는 건 오늘 보러 가는 꽃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다.

봄은 아래에서부터 온다. 천하를 물큰하게 녹이며 나오는 꽃들. 텔레비전, 휴대폰 따위에 꽂혀 있던 시선을 아래로 구부려 바로 발밑을 보라고 꽃은 바닥에서 피어난다. 까맣게 잊고 지낸 찬란한 둘레를 한번이라도 살펴보라며 봄은 땅을 밀어올린다. 봄나물에 입맛을 다시는 요즘 눈으로 드는 꽃 하나를 들라면 단연 동강할미꽃(사진)이다. 무덤가의 할미꽃은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교를 맺은 꽃이다.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그 꽃과는 달리 동강할미꽃은 사는 곳부터가 남다르다. 석회암 지대의 정선이나 영월, 그중에서도 아득한 바위틈에 간신히 뿌리를 내린다. 동강에 드리워진 아득한 뼝대에 고개를 내민 꽃. 보통의 야생화들이 저를 낳아준 고향을 그리워하듯 아래를 향하고 있다면 동강할미꽃은 하늘을 향하는 게 특징이다.

몇 굽이를 지나 드디어 만난 올해의 동강할미꽃. 밤낮없이 흘러가는 동강을 귓전에 꽂고 아득한 바위를 쳐다보면 하늘이 열리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꽃. 작년의 묵은 잎들을 수염처럼 수북하게 달고 있는 동강할미꽃에서 단군할아버지의 모습을 찾는 건 그리 무리한 상상도 아니겠다. 내친김에 나이를 모르겠는 바위의 침묵을 짚고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나의 오른눈은 태양과, 왼눈은 달과 연결된다. 하늘에 구름이 있듯 얼굴에는 보조개가 있다. 하늘이 천둥과 번개를 부리듯 사람은 기침과 재채기를 할 권리가 있다. 언젠가 하늘에 대고 마음껏 기침하고 재채기하는 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동강할미꽃.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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