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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이라고 하면 곧장 쌀밥을 떠올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한탄강, 겨울에는 두루미의 고장이다. 나의 경우 그 사이에 절 이름 하나가 슬쩍 끼어들기도 한다. 얼음 트레킹, 멸종위기종인 분홍장구채 관찰 등 몇 번의 철원 여행에서 백마고지, 노동당사는 둘러보았지만 그 아름답다는 절을 이정표에서 확인하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고대산 지나서 철원의 경계에 들어서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중이었다. 절이라는 곳은 저물 무렵에 가야 더욱 특별한 맛이 나는 법이다. 철원에서 저녁을 맞이했으니 방향은 딱 한 곳으로 정해졌다. 길 위에서의 바쁜 마음을 추슬러 이번에는 곧장 그 절로 들이닥쳤다.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아담한 절이 바로 나타났다. 도피안사(到彼岸寺)는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며, 통일신라 경문왕 때 세운 절이라고 한다. 천년을 훌쩍 뛰어넘는 연혁에 비해 너무나 소박한 규모다. 완만한 경사길을 오르며 오른편을 주목하니 잎은 없고 열매가 모두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다. 히어리, 줄댕강나무, 분꽃나무 등 모두 짱짱한 나무들이 아닌가. 나무수국은 작년 꽃이 미라처럼 아직도 늠름하기만 하다. 하나하나 짚어나가는데 야생화 냄새도 난다. 즉석에서 알아보니, 이곳은 나무들 말고 야생화로도 한 끗발 한다. 노루귀, 복수초는 물론 깽깽이풀, 삼지구엽초가 풍성하단다. 대적광전에 들어가 참배하고 종각 옆의 우람한 산뽕나무를 우러러보는데 처사님이 저녁 공양을 하라시는 게 아닌가.

소박한 밥상. 수제비와 함께 철원쌀밥을 주신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끝의 침묵을 깨고 결국 꽃 이야기를 했다. 도피안사에 계시는 분들은 법력뿐만 아니라 나무와 꽃에 대한 공력이 보통 분들이 아니었다. 앞서 거론한 이름과 함께하는 식탁이 아연 꽃들의 야단법석(野壇法席)! 깊숙이 절하고 내려오는데 날은 어둑해지고, 나무들도 어둠의 이부자리를 깔려고 한다. 절에 왔다가 뜻밖의 거룩한 끼니는 물론 꽃에 대한 이야기로 호주머니가 불룩해졌다. 일주문을 빠져나오다가 짚이는 데가 있어 잠깐 차를 세웠다. 비로소 제대로 들어오는 산의 이름. 절을 품고 꽃을 여는 화개산(花開山)!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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