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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마른 가뭄의 백운산 골짜기를 지나간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흥건한 가운데 생강나무 꽃송이가 꿈틀거린다. 가벼운 봄 흥분을 이기지 못해 야호, 소리를 질렀다. 아뿔싸, 겨울 기운이 낭자한 곳에서의 메아리는 그만큼 날카롭다. 바위를 굴러 떨어뜨리는 작은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다. 우르르 쏟아지는 돌들. 이 와중에 누가 소리를 질렀느냐, 왜 고함을 쳐서 산봉우리의 심기를 건드렸느냐를 따지는 건 이 급박한 사태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이다. 그건 소리에 소리를 더해 바위를 더 부를 뿐이다. 나중 사태가 수습되고 난 뒤에 물어도 늦지 않다. 엎질러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얼른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뭣이 더 중하단 말인가.

물론 백운산을 오르는 동안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다. 칠족령 고개를 넘으며 생각을 더해 나갈 때 슬그머니 떠오르는 이야기 한 토막. 어느 나라에서 추위 내기 대회가 열렸단다. 어느 마을에선 겨울에 불이 언다고 한다. 그 모양이 활짝 핀 꽃 같아서 집 안에 들여놓기도 한단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누가 나선다. 추워도 너무 추워 말마저 언단다. 입에서 나온 말들이 영하에서 그대로 얼어버린다니 말 다한 셈. 그래서 봄이 되면 온 동네가 시끄러워서 죽겠다나 뭐라나. 

말이야말로 참 무서운 질병이겠구나, 생각하면서 골짜기를 빠져나오니 동강이다. 미끈한 강, 튼튼한 강. 형님처럼 믿음직한 강,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강. 이 강도 얼마 전에는 꽝꽝 얼었다. 물이 바닥에서부터 언다면 물고기는 겨우내 어디에서 살 방도를 찾겠는가. 물은 바깥에서부터 얼어 길쭉한 방을 만들어 준다. 덕분에 물고기는 얼음을 이불처럼 덮는다. 이제는 모두 풀려났다. 물도 풀렸고, 물소리도 풀려났다. 물고기도 수척해진 몸을 풀고 있겠지. 아득한 뼝대가 발을 담그는 강가에 갯버들이 있다. 나에겐 봄의 한 지표가 되는 나무이다. 이 강에서 겨울에 벌어진 일을 모두 기억하는 나무. 우람히 흐르는 강물소리에 귀를 씻으며 봄기운을 잔뜩 짊어진 갯버들. 애벌레처럼 올해의 꽃이 꿈틀거리는 갯버들(사진)에 최근의 시름을 얹어두었다.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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