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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록콜록. 아차차. 해버리고 말았다. 후다닥. 황급히 몸을 피하는 이들의 몸동작엔 불쾌함이 배어 있다. 하얀 마스크 위로 굴리는 눈에는 원망이 이글거린다. 하필 왜 내 옆이람. 요즘 같은 메르스 시대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감히 기침을 터뜨리다니. 싸늘한 시선을 감당할 수 없어 눈을 깊이 내리깐다. 십 년 넘게 앓은, 낙타와 무관한 호흡기 지병이 있더라도 지금은 기침 불허(不許)의 세상이다. 잘못하다간 멋대로 나다니는 격리대상자와 같은 몰지각한 인사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이런 판국에 기침이라니.제 죄를 제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 나를 잠재적 보균자로 오해하는 시선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모두들 불안할 법도 한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말 못할 나의 억울함은 이 문제의 바이러스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곳에 기인한다. 온 나라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이 질병의 출현 시점이 하필이면 초여름이라는 점. 바로 냉방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그렇다. 나의 기침은 여름날의 추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과도한 냉방이 어찌나 팽배한지 더운 날이라도 카디건 따위의 ‘보호 장비’를 잊지 말고 반드시 챙겨야 한다. 지하철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미치지 않는 구석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닌다. 버스에서는 에어컨 노즐을 아무리 잠가도 냉한 기운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어 반쯤 포기한 상태로 여정을 인내한다.



극장은 상영작이 뭐든 간에 납량특집과 같은 분위기이고, 은행은 돈을 실온에 보관하면 안 되는지 전체를 냉장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여전히 걷기에 좋고 쾌적한 바깥 날씨를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양태이다. 덕분에 나의 기관지는 따뜻한 계절에도 고생을 면치 못한다. 유전자 재조합으로 숙주와 진화적 군비 경쟁을 벌이는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냉방에 대한 집착과 중독으로 인해 나는 메르스 환자로 오인받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는 병이 아니라, 스스로 초래한 일이기에 할 말이 없다.

지금이 냉방 운운할 때냐고 혹자는 말한다. 나라 전체가 치명적인 전염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마당에 이렇게 시시콜콜한 걸 들먹이다니. 그러나 어느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나머지 의제는 다 무시해도 되는 상황이란 없다. 당장 급한 것은 있으나 우선순위의 상위에 놓였다는 의미일 뿐, 목록의 아래에 있는 문제도 엄연히 중요한 사안이다. 동시다발적, 게다가 ‘시급성’이라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이다. 매일같이 사태가 급변하는 메르스에 대처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좀 더 큰 시간적 스케일에서 보면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에 대응하는 것도 어느 것 못지않게 시급하다. 단지 눈앞에 닥치지 않았을 뿐, 지금부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십 년 후에 재앙이 될 수 있는 일도 당장, 지금 당장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느끼는 온도가 다르다고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계절이 기준이다. 모든 사람을 다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더운 계절이면 바깥보다 약간 덜 덥게, 추운 계절이면 바깥보다 약간 덜 춥게 실내 온도를 설정하는 것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하는 전 지구적 상황에서, 몇몇의 ‘온도 진상’ 손님 때문에 에너지를 더 사용하는 쪽으로 편향되어선 안 된다. 어차피 제각각인 ‘고객만족’이 아니라, ‘계절만족’ 냉난방이어야 한다.

이것은 절대로 개인적인 차원의 푸념이 아니다. 국가적인 일은 물론 지구적인 일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모든 나라는 오는 10월1일까지 각자의 자발적인 온실가스 감축공약 또는 INDC(Intended 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를 유엔에 제출해야 한다. 교토의정서의 효력이 끝나는 2020년부터 시작될 신(新)기후체제 하에서 각국이 스스로 감축의무를 정하는 것이다.

올해 12월 파리에서 열리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는 제출안을 바탕으로 최종 합의가 도출될 계획이다. 마감일 한참 전인 2월에 제일 먼저 제출한 스위스를 필두로 멕시코, 가봉, 에티오피아를 포함하여 현재 12개 나라가 제출을 완료한 상태이다. 애초부터 마감 직전인 9월까지 눈치작전을 펴기로 했던 한국은 거세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당초 계획을 앞당겨 며칠 전에 감축 목표안을 발표했다.

그런데 떡하니 내놓은 안은 놀랍게도 전 정권보다도 감축 목표량을 줄인 14~30%이다. 이 정도면 탄소배출량 세계 7위인 나라치고 거의 비협조 수준이다. 환경단체의 반발에 정부는 우리가 ‘개발도상국’이라는 변명을 내놓았다. 정부만이 아니다. 나라 어디를 돌아다녀도 탄소배출을 걱정하는 흔적일랑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밝힌 등, 여기저기서 들리는 공회전, 극심한 벌목과 개간, 지나치게 추운 냉방이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가령 서울대 관악캠퍼스의 연간 전기료는 100억원이 넘고, 삼성가 자택 전기료는 월 3000만원이 넘는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 모인 곳과 한국 최고의 기업 총수의 에너지 사용 실태는 가히 상징적이다. 지금, 정말로 시급한 일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야생학교는 콜록거린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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