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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다. 바야흐로 휴가의 계절이 도래하고 우리는 떠남을 상상한다. 고운 모래 위로 부서지는 에메랄드빛 파도, 솟아오르는 열기에 나부끼는 넓은 야자수 이파리. 아, 인생 뭐 있나. 그저 이렇게 즐기면 될 것을. 그래서 여행사들의 여름 상품은 바다의 낭만을 담은 사진과 그림으로 가득하게 꾸며진다. 말이 필요없는 것이 바로 이미지의 힘. 알록달록한 색의 비치파라솔, 시원한 열대과일 칵테일, 멋진 선글라스와 이글거리는 태양. 그래 떠나자. 열심히 일한 나.

단숨에 흥과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거기에 진실이 담겨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특히 공간에 관한 이미지일수록, 어딘가에 저 그림과 비견되는 해수욕장이 진짜로 존재하고, 내가 잘만 찾으면 바로 저런 곳에서 올여름을 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나를 흥분시킨다.

그래서 정말로 생각했던 이상과 부합하는 장면을 마주치면 우리는 ‘그림 같다’고 표현한다. 세상을 편집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왜곡’이 불가피한 것이 그림이지만, 그럼에도 세상과의 상당한 수준의 합치가 일어날 때 그 감동은 배가된다. 반면에 가장 감흥이 적고 심지어는 불편할 때는 그림과 현실이 완벽히 서로 유리될 때이다. 일부러 이런 효과를 노린 현대미술 작품을 제외하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보통 내가 속한 이 세상과 현실을 돌아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둔감해진 것일까.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미지가 우리의 실상과 한없이 멀어졌는데도 이 불합치에 대한 알아차림이 적거나 아예 없다. 아이들의 그림이 좋은 예이다. 한국의 어린이는 집을 그리라면 여전히 세모꼴의 빨간 지붕을 그리지만, 실제로 사는 곳은 거의 대부분 직사각형 모양의 아파트이다. 본 대로, 있는 그대로 그리는 대신, 사회적 기호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도시 아이가 보는 가장 흔한 나무인 가로수는 수형을 온전히 유지한 생물이 아니다. 가지가 수도 없이 잘리고 잘려, 흉측하게 아문 상처의 흔적이 즐비한 거의 불구의 나무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크레파스는 둥그런 모양으로 잎을 풍성하게 틔운 나무를 그려낸다. 아이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놀이동산, 길, 자동차 등을 찬찬히 뜯어보면 하나같이 현실과 상당한 차이가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그 괴리감이 가장 압도적인 사례를 꼽으라면, 단연 연못이다. 둥근 타원형 하나 그려 파랗게 칠하고, 속에 물고기와 개구리를, 옆에 강아지풀과 부들을 그려 표현하던 연못. 웬만한 동화책과 아이들 그림에 지금도 단골로 등장하지만 현실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찾아볼 수 없는 곳. 아동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아담한 수중생태계의 신비를 간직한 자연 연못은 습지의 무차별 파괴로 인해 거의 완벽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정확히 타원형 연못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연못을 포함해, 땅은 땅이되 물을 머금고 있어 늘 젖은 땅인 습지(濕地) 일반에 관한 얘기다.

습지에 대한 변호는 모두 습지의 순기능과 효용을 피력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어떤 혜택을 제공하는지에 대한 기능주의적 변명은 자연의 진정한 가치를 실추시킬 뿐이다. 순수한 아이가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대상이라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충분하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습지를 없애면서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김포공항습지가 그 좋은 예이다. 서울과 부천의 경계이자 김포공항 인근에 소재한 이 묵논습지에는 천연기념물 12종, 멸종위기 1급과 2급인 14종 등 법정보호 또는 관심생물이 총 27종이나 서식한다. 희귀한 맹꽁이, 금개구리, 무자치, 구렁이는 물론 최근 조사에서 심각한 멸종위기종인 수원청개구리도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활동 중인 학생 환경모임인 ‘뿌리와 새싹’이 2013년 신종으로 추정되는 거미를 발견해 학계에 알리기도 했다. 도시 인근임에도 풍부한 생물다양성을 자랑하는 이 습지를 두고 나오는 이야기는 우려한 대로이다. 골프장이 생긴다는 것이다. 한국공항공사와 보일러로 유명한 기업이 함께 추진하는 골프장 사업으로 이 보물 같은, 아니 이미 천혜의 보물인 습지를 전부 메워버린다는 계획이다. 이 정도의 생태학적 범죄행위에 해당되는 사업조차 소위 환경영향평가를 떡하니 이수한 걸 보면 이 나라에 법체계라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한가 의문스럽다. 이 좁은 국토에 극히 소수만이 즐기는 컨트리클럽을 또 하나 추가한다는 것만으로도 황당한데, 이를 위해 희생당하는 생명과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생각하면 가히 충격적이다. 지금이라도 이 어이없는 기획이 무산되기를 기원하며, 마음속에 예쁜 연못 하나를, 야생학교는 그린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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