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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동안 재직한 일본 교토의 리쓰메이칸대학을 떠나, 올봄 생활의 중심을 한국으로 옮겼다. 장영달 총장의 부름을 받아, 석좌교수로 전주의 우석대학교에 몸을 담게 되었다. 석좌교수도 천차만별이지만, 학식이 높은 석학에게 제공되는 자리라고 하는데, 정통 아카데미즘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는 당치 않은 자리다. 또한 우석대의 첫번째 석좌교수가 김근태 전 장관이라고 하고, 이번에는 다산학의 제일인자 박석무 선생님과 함께 임명되었으니, 더욱더 송구스러울 뿐이다.

장 총장이 우석대에 초빙된 것은 그가 우석대가 소재하는 완산군에서 4선을 한 국회의원이었다는 점도 있겠으나, 친화력과 정치력, 리더십이 있는 그에게 지방 약세대학인 우석대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 개성 있는 매력적인 학교를 만들라는 바람이 모아졌다고 볼 수 있다. 서울에 있는 거대하고, 자금력이 있는 유명대학과 정면으로 겨루어 살아남는 길은 보이지 않으니 민주·평화, 실용융합, 경제과학에 특화된 학교라는 목표를 내세워 독자 도생하려는 전략이다. 1974년 반유신독재의 민청학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것이 정치운동의 원점이자, 정체성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장 총장은 민주, 평화, 통일을 선도하는 인재를 배양하는 학교를 만드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 맥락에서 동아시아의 평화·안전보장, 한반도의 통일·화해를 연구하는 ‘동아시아 평화연구소’의 창설이 내게 맡겨졌다. 10월17일에 기념 심포지엄으로 출범하기로 했는데, 문제는 간단치 않다. 무릇 연구기관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연구자로 구성된 연구회나 학과 같은 것을 씨로 하고 연구회를 거듭하면서 학내외의 학술지원을 받고 체제를 정비하고 연구소 설립에 이르든지 아니면 국가와 같이 많은 자원을 가지는 강력한 주체가 톱다운 방법으로 설립하는 것인데, 우석대에는 물적·인적 자원이 결핍해 있다. 평화연구를 하는 전문가 그룹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화연구와 유관한 인문·사회과학계 학과들조차 구조조정으로 인해 근년에 차례차례 폐지되었다고 한다. 물론 아직 연구실적도 없는 곳에 공적 기관이 연구지원을 할 리도 만무한 것이다.

게다가 ‘평화’는 전쟁의 대립 개념이고 듣기에 부드러우니 누구나 찬성하는 말처럼 생각되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가 않다. 일본의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평화라는 개념도 잘 모르지만, 자기들 일상과 무관하고 어딘가 정치적인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분단 독재정권하에서는 북한에 대해서 ‘멸공’이나 ‘승공’이지, 통일이라는 말 자체가 불온하고 ‘평화’라는 말은 용공적이라고 금기시되어왔다. 최근까지 한국 평화학회의 주류는 안전보장론, 즉 무력에 의해 적대세력을 제압한다는 힘의 정치론이다. 평화학의 세계적 추세에서 보면 지극히 보수적인 국제정치학자가 한국 평화학회 주축이었다. 한국에서 평화운동이나 평화연구가 어느 정도 틀을 잡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가 진행된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더욱더 큰 문제는 사회주의 붕괴 이후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즉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의해서 점거당해온 점이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분배중심) 성장전략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지배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사상이 정치, 교육,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 침투하여 우리를 꼼짝 못하게 얽어매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가령 학교교육의 상대평가제도에서 학생 모두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A가 전체의 20%, B는 40% 하는 식이기에 필연적으로 학생들의 우열과 승패가 가려진다. 패자를 지속적으로 산출하게 되고 그 위에 소수의 승자가 군림하는 구조가 형성된다. 게다가 승자들도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항시적으로 경쟁을 강요받는다. 그 결과 타자를 의심하여 홀로 이익을 취하려는 매우 비인간적이고 냉혈한 인격이 형성된다. 교육제도에서도 지방분권과 균형 있는 분업과 협력을 장려해야 하며, 모두가 동시에 이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촛불정권의 정신과 구상은 분명히 그랬을진대, 신자유주의와 자본가-지주동맹의 서슬에 힘을 못 쓰고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다. 이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정부를 중심으로 촛불세력들이 ‘일심단결’하고 똘똘 뭉쳐 일시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을 밀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 집단적 이기주의가 상호 충돌하는 다원적 ‘민주주의’제도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튼 거대 대학과 거대 프로젝트 사이에 끼인 일엽편주 같은 우리 연구소는 독자적인 행보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우선 동아시아 평화연구소가 ‘동아시아’를 내거는 것은 우리 연구소가 결코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적 입장에 서지 않겠다는 표명이다. 깊이 천착할 지면은 없으나, 언뜻 반패권적이고, 반권력적으로 보이는 평화, 민주, 인권이라는 가치들도 서구의 안경을 쓰고 서구에서 태어났으며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라는 정치·역사적 지역 개념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이 지역을 석권한 제국주의의 침략과 지배에 의해 만들어진 피와 눈물로 얼룩진 개념이고, 우리나라의 분단이 상징하고 있듯이 오늘날까지도 씻겨지지 않고 있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19세기 이후의 동아시아 형성사를 연구한다.

우리가 구상하는 평화는 군사력이나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고, 신뢰에 의한 평화다.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으로 소통을 해야 하며, 상호의 입지와 이해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이해하여,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을 되비추어보고 그 문제에 대한 전체적인 시야를 얻어야 한다. 우리의 평화연구 방법은 난삽한 현학적인 논쟁을 멀리하고 현실과 상식 속에 있는 평화의 실현을 추구하여 구체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사회와 상호 교류한다. 또한 우리 남북이 그러듯이 중국, 대만, 오키나와 등 이웃들과의 역사적 연관 속에서 연구하고 연대한다.

나의 자산은 동아시아 평화운동과 과거청산운동 속에서 다져온 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 연구소는 이 자산을 밑천으로 조그마하고 구체적인 과제를 모든 분들과 함께 풀어나갈 연구소가 되려고 한다. 많은 분들이 힘을 보태어 주시면 감사하겠다.

<서승 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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