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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16일 타이베이에서 <옥중19년> 중국어판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출소한 지 27년 만의 일이다. 중국 독자들에게 내 책이 읽힌다는 것은 큰 기쁨이다. 벌써 한 세대 전의 독재시대 한국 정치범감옥에서의 투쟁이 젊은 중국 독자들에게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지만, <옥중19년>이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침략·지배의 역사, 특히 해방 후 냉전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국가폭력이라는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정치현상이기도 하고,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이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의 현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대만에서 장쥔홍(張俊宏)씨로부터 오찬 초대를 받았다. 장씨는 1979년 당시 잡지 ‘미려도(美麗島)’의 편집장으로, 대만 민주화의 물꼬를 튼 ‘미려도’ 사건의 핵심인물로 반란죄로 12년형을 받았다. 그는 5년 후에 출소해 민진당의 창당 사무총장, 당대표 대리, 네 번의 입법위원(국회의원)을 지낸 대만 정계의 거목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스캔들도 있었고, 일국일제도, 동아시아 공동체 등의 주장으로 민진당 주류에서 멀어지고 ‘외톨이(孤鳥)’ 소리를 들은 지 벌써 10년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미국과 북한의 핵 대치로 세계는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있으며, 평화가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했다. 평화를 위해서는 우선 큰 나라도 작은 나라도 평등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EU처럼 동북아 공동체를 만들어 국가 간의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함부로 하고 큰놈이 작은놈을 속이는 것이 평화의 길이 아니며, 북한에 핵무기를 포기케 하려면 먼저 미국이 무력 위협을 하지 말아야 하며, 핵무기는 생사의 위기에 직면한 북한의 자기보존을 위한 마지막 무기라고 했다. 북한도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처럼 안전과 번영을 원하고 있는데, 제재강화는 북한의 번영의 길을 뺏어버린다. 남북한은 언젠가 통일할 것이며, 상호통상을 강화하여 사람의 왕래를 증대시켜야 한다고도 한다. 장씨는 ‘동아시아 평화선언’을 내고, 전면적 핵 금지와 유엔의 통일적 관리를 호소하고, 만약 유엔에 능력이 없다면 먼저 대만과 한국의 민간단체가 공동협조로 평화선언을 추동하고, 전 세계에서 인터넷 투표를 실시하여 세계평화를 위하여 핵무기를 전면 통제할 것을 호소하자고 했다. 이 제안은 대만의 한 민간인이 제기한 것이며, 현실성이 약하지만, 한반도 평화문제를 동아시아 민간인도 매우 우려하고 있으며, 약자와 소수자의 관점에서 북한을 이해하려고 한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대만신문 ‘중국시보’에서 여론조사를 하고 있다. “트럼프가 북한, 이란 등 4개국의 지도자를 ‘불량배’, ‘악당’이라고 매도했는데 진짜 악인은 누구일까요?”, “대만은 유엔 회원국이 아닌데 대북 제재에 동참해야 할까요?”이다. 투표는 진행 중이지만, 앞 설문에서 1위는 압도적으로 트럼프(71.5%)이며, 2위가 김정은(13.9%), 3위가 IS의 지도자(10%)로 나온다. 후자의 설문에는 90%가 필요 없음이고, 필요함은 10%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결과를 보편화시킬 수는 없지만, 직접 미국의 풍압을 받지 않는 곳의 민심 동향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그와 대조적인 것이 아베 정권이다. 유엔 연설이 북한 비난과 강경 제재 주장으로 일관되어 “모든 선택이 테이블 위에 있다”는 트럼프의 말을 전폭 지지한다면서 평화를 논해야 하는 유엔에서 무력 공격을 가장 노골적으로 시사했다. 일본에 요즘 ‘해산 바람’이 불고 있다. 아베가 이달 28일에 국회를 해산하고 11월22일에 총선을 실시한다고 했다. 내각을 개조한 지 한 달도 채 안되는데, 당돌한 국회해산은 자민당 내부에서도 ‘대의 없는 해산’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야당의 내분과 분열의 틈을 탄 ‘약자 괴롭히기 해산’, 사학재단 비리 의혹에 얽힌 아베가 국회에서의 추궁을 피하기 위한 ‘적전도주 해산’ 등 비난이 비등하다. 선거 쟁점으로 소비세나 개헌문제를 내걸고 있지만, 북핵 미사일 위기가 고조하고 있어서 대북(강경)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물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다. 아베가 위기를 선동해놓고 그 안보위기로 국민을 겁박하는 자작자연이다. 세계에서 오로지 아베만이 인종주의자, 여성차별주의자인 트럼프의 ‘미친 정치’에 충성을 다 하는 척하면서 호가호위하고 전쟁 위기를 증폭시키고 일본의 군과 전쟁의 합법화에 골몰해왔다. 한국은 이들을 믿고 ‘한·미·일 동맹’을 신주처럼 모시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문재인 정부는 유엔에서 가장 강력한 대북 압력을 주장하면서 미·일의 뒷북을 칠 뿐, 평화 의지나 자주성을 부각하는 독자성도 동창성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800만달러의 대북인도지원 결정에 대해 아베로부터 훈계조로 견책을 받아 “인도지원과 정치는 별개”, “실시 기일 미정”이라는 변명에 시종하고 있다. 진정 인도지원이라면 떳떳하게 지금 바로 실시하면 된다. 생색내면서 줄듯 줄듯 안 준다면 상대를 능멸하고 약 올리는 결과밖에 안 된다. 문 대통령이 “석유 공급을 끊어달라”고 하다가, 푸틴 대통령에게 오히려 “인민생활에 피해가 간다”고 타이름을 받는 창피한 일이 있었다. 남에게 같은 겨레를 괴롭혀달라는 부탁은 입이 찢어져도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어느 아둔한 참모가 보좌하는지 모르나, 지금 북한은 사생 결단으로 핵미사일 개발에 매달리고 있는데, 평화를 보장받기 전에는 아무리 압력을 가해도 포기할 리가 없다. 정부는 제재니 압력이니 하는 헛발질을 그만하고, 진정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저지하고, 한반도 평화실현의 운전대를 잡으려면, 트럼프에게 “전쟁도발을 그만하고, 북한과 대화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직언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 지역을 전쟁위기에서 구해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또한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든, 대만의 장씨 말마따나 시민들은 “전쟁반대!” “군사대치 중지! 즉시 대화!” “동아시아 비핵화, 평화!”를 외치고 스스로 평화를 지켜야 한다.

 

※미려도 사건 : 세계인권선언일인 1979년 12월10일, 대만 가오슝(高雄)에서 잡지 ‘미려도’가 주최한 시위에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주최자 8명이 투옥된 사건이다. 가오슝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서승 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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