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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한가위 연휴가 시작된다. 길게는 10일 동안이나 이어진다.

설날과 더불어 최대의 민속 명절을 맞는 한반도는 어느 때보다 군사적 긴장이 팽팽하다. 모두가 안타까워하고 염려한다.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북한은 핵·미사일 도발을 강행한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거친 ‘말폭탄’을 주고받는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싸우는 것 같다”(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는 국제사회의 비아냥도 잇따른다. 서로의 정치적 셈법이 시민들의 불안감, 공포를 자극한다는 날선 비판도 쏟아진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이 있다고, 극한 상황 속에서 대화 자리는 만들어진다고 위안한다. 하지만 우발적 충돌, 황당한 전략적 오판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은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한다는 공감대도 단단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은 안된다는 다짐 속에 고향길에 나선다. 예년처럼 민족적인 대이동이다. 한국교통연구원은 명절 연휴 동안 전국 예상 이동인원이 37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한다. 국내외 여행길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고향으로 향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못한 부모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안부를 물으며 덕담을 나눈다. 먼저 살아간 조상들에게 다 같이 정성 들여 장만한 음식들로 제례를 올린다. 묘소를 찾는다. 밤이 되면 어릴 적 친구들이 하나둘 느티나무 아래 모여든다. 술잔을 나누며 북한과 미국의 대치, ‘코리아 패싱’도 걱정할 것이다. 적폐 청산과 경제를 둘러싼 의견이 오가고, 청년들의 일자리에 노후 염려까지 이어진다. 서로의 팍팍한 삶을 위로한다. 전형적 한가위 풍경이리라.

한가위는 그 유래를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시대의 ‘가배’에서 찾으니, 1500여년의 세월 동안 이어졌다. 시대나 삶의 양식에 따라 형식과 내용은 달라졌다. 하지만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며 자연과 신과 조상들께 감사드리고, 서로의 살아감을 보살피는 본질은 여전하다. 우리만이 아니다. 저 먼 고대부터,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디에서든 한가위 취지와 비슷한 의례의식이 전해진다. 중국의 중추절, 일본의 오봉절을 비롯해 미국 등의 추수감사절 같은 게 대표적이다.

시공을 넘어 인류 보편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화 속의 한 장면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쑥 솟은 극적인 존재가 아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빠와 엄마, 그 엄마와 아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렇게 대와 대를 잇는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어서다.

얼굴도 모르는 고조부의 무덤 위에 자라난 잡초를 뽑아내며 문득 나의 존재를 알아채는 게 한가위다. 고향에서 보내는 시간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살펴보는 시간이다. 폴 고갱처럼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곤 자신이 길고 질긴 뿌리와 이어졌음을 깨닫는다. 그 뿌리를 인식한다면 삶을 허투루 살아가기 힘들다. 내 혼자가 아니라 자식이며 형제자매이고, 부모라는 사실, 나아가 만물이 얽히고설킨 인드라망임을 알면 몸과 마음을 가다듬게 된다.

나의 뿌리가 있다는 것, 뿌리에 대한 인식은 든든한 ‘빽’이다. 삶이 나를 속일 때 기댈 수 있는 언덕이다. 부평초처럼 떠도는 게 아니라 질경이처럼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귀성길은 자신의 존재를 재인식하는 깨달음의 길이다.

최근 민속 명절의 쇠퇴, 전통의 붕괴를 비판하는 견해도 많다. 명절 연휴에 고향대신 해외여행을 떠나거나, 전통적 의례의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까워할 수 있지만 시대와 생활양식이 바뀌면 전통도 변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변하는 게 당연하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정밀하게 고찰했듯, 우리가 전통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시대에 따라 만들어지고 발명되기 때문이다. 실제 남녀의 이혼이나 재혼·재산상속에 있어 고려시대만 해도 평등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차별은 조선 중후기 들어 본격화되지 않았는가.

전통적 격식을 따져 의례의식을 치르는 것, 의례의식보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정을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 모두 의미가 있다. 저마다 자신의 뿌리를 새삼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한가위라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의미가 충분하지 않을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은 풍성한 연휴를 보내기를 기대한다.

<도재기 국제·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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