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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소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의 한 미술교사는 인문학 열풍이 불 때 문학, 역사, 철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인문학 강연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에 책을 멀리하는 중학생 딸과 제자들도 걱정됐습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강의에서 예술도 인문학이라는 말에 힘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전공인 미술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그는 학생 개인전을 위한 갤러리도 만들고, 아이들의 자존감 회복을 위한 벽화 그리기 작업도 하고, 자연미술 함께하기를 일상적으로 전개했습니다.

미술실을 활용한 갤러리에는 격언들이 걸렸습니다. “미술은 다름이 중요하지 누가 더 나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로와 피카소는 서로 다른 것이지 누가 더 잘하는 게 아니지요. 다른 것을 맛보는 것이 예술이지 1등을 매기는 것이 예술이 아닙니다.”(백남준) “당신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입니다.”(파블로 피카소) “모든 사람이 예술가입니다.”(요제프 보이스) 밤에 아르바이트를 뛰는 아이들은 음식 미니어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세에는 음악도 인문학이었습니다. 지금은 인간의 이성보다 감성이 중요시되는 세상입니다. 감성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예술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어쩌면 앞으로 생활에 기반을 둔 모든 일이 인문학적 사유가 될 것입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지금은 과학기술 혁명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과학 또한 인문학인 게 당연합니다. 과학의 중요성을 정말 제대로 일깨워준 것은 올해 3월에 이세돌이 ‘알파고’와 바둑을 둔 이벤트일 것입니다. 이벤트 이후 모든 매체가 인간의 경쟁자가 기계(슈퍼컴퓨터)라는 것을 수없이 떠들었습니다.

‘알파고’의 충격 이후, 빅 데이터와 인공지능, 제4차 산업혁명, 빅 히스토리 등에 대한 관심이 폭증했습니다. 제4차 산업혁명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들고 물리적인 벽을 뛰어넘는 시공간의 혁명입니다. 교양과학자인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김영사)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의 인기가 높았던 것이 빅 히스토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반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김상욱의 과학공부>(동아시아)에서는 “역사를 보는 신선한 틀을 제공”하는 ‘빅 히스토리’라는 새로운 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모든 것은 빅뱅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별과 원소의 탄생, 태양계와 지구의 탄생, 생명과 인류의 탄생, 세계의 연결, 변화의 가속, 그리고 미래이다. 여기에 민족이나 국가는 없다. 우리 모두는 빅뱅에서 이어져오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어 인류라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21세기의 역사관이라 생각한다.”

이정모 관장은 또 “진화를 대표로 했던 교양과학서적 시장에 물리학이 돌풍”을 일으킨 것은 “‘나를 작동시키는 시스템’과 ‘이 사회를 작동시키는 시스템’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부조리를 교정하고 싶어 한다”고 정리했습니다. 올해 <김상욱의 과학공부>, 김범준의 <세상물정의 물리학>, <이종필의 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안상현의 <뉴턴의 프린키피아> 등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담은 물리학자의 책들이 대중의 높은 반응을 얻어냈습니다.

결국 과학적 사유란 본질적인 ‘나’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빅 히스토리와 물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대중이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안목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김상욱의 과학공부>는 “2015년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단행했다.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나치도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책을 불태웠고 제국주의 일본도 올바른 동아시아 건설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중략) 역사에서 ‘올바른’ 것이란 원래부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책은 이어 “과학에서는 올바른 답은 많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으로부터 얻어진다. 여기에는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아인슈타인의 미친 생각까지도 포함된다. 만약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정부가 결정하는 거라면, 우리는 지금도 천동설을 믿고 있을지 모른다”면서 국정교과서를 도입하려는 정부를 통렬하게 공격했습니다.

과학과 예술은 모두 “장벽을 뛰어넘게 만드는 힘”인 상상력을 필요로 합니다. 김상욱 교수의 지적처럼 과학적 상상력은 “보편적이고 재현가능한 실험적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예술적 상상력은 정말 백지수표의 상상”입니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분노한 사람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약속을 잡고 광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노래와 예술적 퍼포먼스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뭉쳤습니다. 그들은 소셜네트워크로 연결되어 무슨 일이든 ‘함께’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모든 기술을 이용해 과학적 사유와 공감 능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기계에 완전히 종속되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을 거꾸로 가는 사고를 하는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는 절대 종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올해 출판시장과 박근혜 국정농단으로 인한 촛불시위는 그 가능성을 한껏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해의 출판계 키워드를 ‘네트워크형 인간의 과학적 사유’로 정했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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