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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飄西轉路岐塵 동으로 서로 헤매며 갈림길의 먼지를 뒤집어썼지
獨策羸驂幾苦辛 홀로 여윈 말 몰고 다니며 얼마나 고생스러웠는가
不是不知歸去好 돌아가는 게 좋은 줄 모르는 건 아니지만
只緣歸去又家貧 돌아가 봤자 내 집은 가난할 따름이니
_최치원, <길 위에서[途中作]>


20111월도 다 보내며 최치원이 길 위에서 부른 노래한 자락이 떠오릅니다. 시 가운데는 그냥 시도 있지만, 발라드에 엘레지까지 겸한 노래도 있지요. 민요에서 기원한 한시 갈래인 악부樂府를 가져다 설명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마음의 행로를 위의 예처럼 부른다면, 그야말로 시보다 노래에 가깝지 않겠어요.
최치원이 동표서전東飄西轉하며 갈림길의 먼지를 뒤집어쓰는 길 위에 오르기는 그의 나이 12세 때입니다.

868, 신라 경문왕 8년 신라 경주 출신 12세 소년 최치원은 당나라로 유학 가는 뱃길에 오릅니다. 이때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부친 이별의 한마디는 지독했습니다“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열심히 해!”
아버지의 격려 덕분이었을까요? 신라를 떠날 때 12세였던 소년 최치원은, 18세 되던 해인 서기 874년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빈공과에 급제합니다. 당나라에 유학한 지 6년 만이었습니다.




874의 빈공과 급제로 동표서전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외국인 급제생이 바로 임용될 리 있나요. 최치원은 임용을 기다리는 2년간 낙양을 떠돌아야 했습니다. 이때의 동표서전은 아마도 임용을 바라 실력자들을 찾아다닌 동표서전이었겠지요.
최치원은 낙양의 길 위에서 많은 시를 썼습니다. 실력자들에게 자신의 한문 교양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시는 써야 했습니다. 옛 동아시아의 글쓰기, 특히 불우한 동아시아 교양인들의 글쓰기는 실력자의 눈에 띄기 위한 몸부림과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맞잡이로 치는 <문심조룡文心雕龍>도 지은이 유협劉勰이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절치부심한 결과였습니다. 실제로 유협은 <문심조룡> 덕분에 실력자에게 발탁되었죠. 이런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세기가 어렵습니다. 이백, 두보, 한유 들이 다 그랬습니다. 교양은 있되 문벌이 보잘것없어불우했던 옛 교양인들 마음 한구석엔 나는 언제쯤 인정을 받나하는 노심초사가 늘 부글거렸던 것입니다.

876 지루한 백수 시절을 지낸 최치원은 당나라 선주의 율수현위로 임용됩니다. 시골 경찰서장쯤 되는 말직이지요. 그러나 뭐가 맞지 않았던지 이마저 이듬해에 사직하고 맙니다.

878도 동표서전일 뿐입니다. 사직이 촉발했겠지만, 이번에는 중국인들과 겨뤄야 하는 굉사과宏司科 급제를 노리며 공부를 시작합니다. 빈공과만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했겠지요. 그러다 또 뭐가 어그러졌는지 공부를 집어치우고는 이위李尉의 문객을 거쳐 회남절도사 고변高騈의 막하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듬해 큰일이 터집니다.

879875년에 일어난 왕선지의 반란에 호응했던 황소가 본격적으로 당제국을 휩쓸기 시작한 해입니다. 이에 고변은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곧 토벌군 총사령관이 되어 황소 토벌에 나섭니다. 그 막하에 있던 최치원은 종사관從事官 신분으로 고변을 따라갈 수밖에요. 이렇게 외국 내전에 껴든 최치원은 고변의 막하의 전선에서 4년간 동표서전합니다.

880은 그 4년 가운데서 기억할 만한 해입니다. 종사관의 기본 업무는 문서 작성입니다. 이해 최치원은 업무의 일환으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썼는데 이 글이 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882에는 당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습니다. 중앙최고위로부터 표창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문명을 날리더니 드디어 공적과 업무 수행 능력까지 한 꿰미로 인정을 받았네요. 879년부터 시작한 동표서전이 조금 보람을 거둔 셈입니다.

883의 보람도 잊을 수 없습니다. 군문을 벗어난 최치원은 <토황소격문>을 포함한 자신의 글을 모아 자신의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을 엮습니다.
<계원필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입니다. 무엇보다 신라의 문화 수준이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인 당나라의 수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예로 손꼽히지요. 조선의 문인들은 최치원과 <계원필경>이 우리나라 문학사의 물꼬를 텄다고 평가했어요.
<신당서><계원필경>을 기록했습니다. <신당서>에 언급된 외국인의 저술은 오로지 <계원필경> 하나뿐입니다. 이는 당나라의 정사正史를 편찬한 중국인들이 <계원필경>을 당이라는 시대가 낳은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했다는 증거입니다.
20세기 전반, 상해 상무인서관이 그동안의 문자 유산을 총정리하고자 편찬한 <사부총간四部叢刊>에도 <계원필경>은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884. 이젠 가난하나마 내 집으로 갈 결심을 합니다.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 출신 최치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은 신라 관직 제6등 아찬 자리입니다. 동시대 당제국 교양들로부터 인정받고, 황제의 표창까지 받은 외국인으로서는 정말 가난할 수밖에 없는 고향입니다. 그래도 한 해 전, 문집을 정리하며 인생의 제2막을 결심했을까요. 최치원은 당 희종에게 예를 갖추어 사직의 글을 올렸고 희종은 사직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립니다.

885. 최치원은 드디어 가난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2세에 바다 건너 당으로 떠난 지 16만의 귀향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갈림길의 먼지를 뒤집어쓰지 않아도 좋을까요. 그러나 고향은 당제국만큼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경주의 진골들은 왕위를 놓고 대립하고 있었고, 지방의 실력자인 호족들은 자신의 세력을 키워 경주 세력과 맞서고 있었습니다.
농민의 반항과 호족과의 불화 때문에 조세는 걷히지 않았습니다. 신라 지식인, 특히 골품제에 막힌 많은 6두품 출신들이 견훤이나 왕건에게 귀화합니다. 지식인들이 제 나라를 저버릴 만큼 신라는 희망이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고향의 가난은 몹시 위험하고 비참한 가난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최치원은 신
라에 남아 신라를 다시 바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좌절뿐이었습니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치원은 [중략] 신라에 돌아와 자기 뜻을 행하려 했으나 세상이 말세가 되어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므로 외직으로 나가 대산군(오늘날의 전북 태인) 태수가 되었다.”
무슨 뜻일까요. 외직으로 나갔다는 기록의 속뜻은 최치원이 중앙에서 개혁을 추진할 만한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지방직으로 밀려났다는 말이겠지요.

894 최치원은 마지막 한 번 먼지를 뒤집어쓸 각오를 합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 오늘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십여 가지 방법을 올린 것입니다.
<시무십여조>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아무튼 진성여왕은 일단 이를 받아들여 최치원을 아찬에 임명합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아찬은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이되, 신라 제6등 관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진성여왕은 897효공왕에게 선양하는 형식으로 쫓겨납니다. 또한 진골 간 왕위 다툼의 결과였습니다.

가난한 고향집으로 돌아온 최치원은 꼬박
10년을 다시 먼지를 뒤집어쓰며 홀로 분주했던 듯합니다. 그러고는 908년까지 생존했으리란 추정 말고는 어떤 연대기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노력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최치원은 어느 순간부터는 방랑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발자취는 경주 남산, 의성, 지리산, 창원, 부산 해운대 등에 남았고 말년에는 가족을 거느리고 해인사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가족을 거느리고 해인사에서 숨어 살았다에서 공식 기록은 끝입니다.


東飄西轉
,
동으로 흩날리고 서로 굴렀답니다. 보신 연대기 그대로입니다.

路岐塵,
고향 떠나기도 갈림길이었고
, 말직 사직과 재수 준비도 갈림길이엇고, 종군도 갈림길이었고, 귀향도 갈림길이었고, 6두품 주제에 당제국에서의 이력으로 달려든 신라에서의 벼슬살이도 갈림길이었습니다.

獨策羸驂幾苦辛,
길 위에서 혼자였죠. 제국의 관리였지만 외국인이었습니다. 이위나 고변이나 쓸 만한 문서 작성자 하나 있으면 그만입니다. 최치원은 홀로 말을 몰고 가는 신세였습니다. 빈공과 급제생이란 출신도, 여윈 말[羸驂]처럼 불안한 탈것이었겠지요. 정말 얼마나[] 고생스럽고 신산했을까요[苦辛].

不是不知歸去好,
고향으로 가는 것이 좋은 줄 모르지 않는 게 아닙니다. 이 몇 겹을 이룬 부정. ““~이다하고 확정해주는 말입니다. 그 앞에 부정사가 붙었습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돌아감이 좋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只緣歸去又家貧,
, 좋은 줄 모르는 게 아닌데, 고향집 형편도 뻔합니다. “지연只緣다만, 그저 ~하기 때문이다하는 말입니다. 돌아가 봐야 또 고향 내 집도 가난하기 때문이니, 거기나 여기나 고생스럽고 신산하긴 마찬가지라 딱히 돌아가야지 단안하지 못하고 우물쭈물인 채입니다.

900년 전의 나그네가 길 위의서 흩뿌린 감상이 돌아돌아 보이는 설입니다. 연말연시는 바쁘다바쁘다 하다 그만이고, 이제 다시 설이 되니 나는 어느 길에 서 있는지, 돌아갈 데는 있는지 헤아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저마다의 좌표 잘 붙들고 있는지요. 느꺼움이 차오르매 옛 노래를 펼치게 됩니다.


*사진은 전북 정읍 무성서원에 있는 최치원 영정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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