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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林和, 1908~1953.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스무 살에 이미 영화/연극/미술 평론을 시작해, 스물한 살에는 이미 프롤레타리아 문학론의 주요 논객이 되었으며, 대선배 김기진과 박영희의 문학론을 차례로 제압하고 조직 주도권을 장악해, 1932년 스물네 살의 나이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KAPF) 서기장에 오른 임화의 얼굴이다.


임화는 19081013일 서울 낙산 아래, 그러니까 오늘날의 서울 동숭동에서 태어났다. 해방공간에서도 좌는 물론 우를 일정정도 포괄한 문학 조직 활동의 선편을 쥐고 있었지만 박헌영 노선에 따라 월북해 해주에서 남로당 활동(대남 공작을 포함한 활동이었는 듯)하는가 하면, 북의 중앙에서는 조소문화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활동 등을 활발히 펼쳤다. 임화는 1950년 한국전쟁이 나고 북이 서울을 점령하게 되고서야 다시 고향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의 마음을 그는 시에 이렇게 담았다.

남은
원쑤들이 멸망하는
전선의 우룃소리는
남으로 남으로 멀어가고

우리 공화국의 영광과
영웅적 인민군대의
위훈을 자랑하는
무수한 깃발들

수풀로 나부끼는
서울 거리는
나의 고향
잔등의 채찍을 맞으며
사랑한 우리들의 수도다.
_임화, <서울>에서

서울에 보기 드문 유의 아우라를 부여한 이 서울내기의 시작은 다다이즘에서 출발했다. 1927년 발표한 시 <지구와 빡테리아’>의 머리 부분을 보자. 이상의 <오감도> 못잖은 난해 시구다.

기압이저하하였다고 돌아가는철필을
도수가틀닌안경을쓴 관측소원은
대에다 쾌청이란백색기를내걸었다


그러나 이 시기 임화의 쓴 다다이즘 경향의 시는 그저 난해할 뿐만 아니라 시의 질 자체가 우수했다
. 그의 다다이즘 이력은 그 다음 이력에 모순 없이 녹아든다. 시의 전위-아방가르드가 계급투쟁의 전위-아방가르드로 옮아가는 풍경은 얼마든지 자연발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임화는 <지구와 빡테리아’>를 쓴 해인 1927년 카프에 가입해 아나키즘과 투쟁해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주도한다. 이후 카프 서기장이 되기까지 문단의 선배들과 벌인 논전 또한 명도와 채도가 높은 선명성투쟁으로 장식되는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1928년에는 영화 <유랑流浪> <혼가昏家> 들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등 가장 현대적인 예술 갈래에도 끝없는 관심과 실천을 보였다. <우리의 소원>의 가사를 쓴 것으로 유명한 영화인 안석주는 영화배우 임화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떤 실없는 사람이 씨를 코레아 바레티노라고 별명을 지은 만큼 서양서 온 미남자 같은 미목수려의 청년시인이다. 어디나 그의 모습 중에서 도회인의 면영이 구김새없이 드러나지만 그의 창백한 혈색이라든지 그늘진 눈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중의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민하던 그때에 면영을 연상케 하는 때도 있다.
_조선일보, 1933121일자


안석주가 빌려온 바렌티노는 곧 무성영화 시대의 수퍼스타이자 최초의 아이돌 배우, 마초 배우, 남성 섹스심벌로 평가되는 이탈리아 출신 할리우드 영화배우 루돌프 발렌티노(1895~1926)이다. [계속]


*이미지는 구글 이미지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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