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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金祐鎭, 1897~1926). 1920년대 그 누구보다도 뜨겁고 환한 문학 불꽃을 사르다 스스로 세상을 버린 김우진의 얼굴이다.


한국 희곡사-연극사 연구에서 우뚝한 업적을 남긴 연구자 유민영은 김우진에게 기성 문단을 훨씬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는 유일한 극작가라는 평가를 부친 바 있지만, 김우진의 문학 활동은 오늘에 견주어도 빛이 바래지 않는다.

김우진은 1897년 전라남도 장성군 관아에서, 장성군수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규는 군수였을 뿐 아니라 대지주였고 슬하에 11남매를 둔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다. 김우진에게는 집안의 적장자嫡長子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정을 이끌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었다. 이는 숙명이었다. 이때 대지주의 가정이란 장원 곧 대농장의 머슴, 고용 들을 포함한 몹시 봉건적인 개념의 가정이었다.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김우진은 1915년 일본 큐슈의 구마모토농업학교熊本農業學校로 진학한다. 예비 대지주, 예비 농장주의 경영수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재학 중이던 1916년에는 경학원經學院 이사 정운남鄭雲南의 딸과 정점효鄭點孝 결혼했고 정점효 사이에서는 자녀 둘을 두었다.
대지주와 경학원 이사의 인연 맺기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경학원은 중세 국립대학인 성균관이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등되면서 몸을 바꾸게 된 유교 교육 기관이다. 경학원은 철저하게 일제에 순응적인 곳이었고, 일관해서 봉건성을 유지한 곳이었다. 가부장 김성규는 아들에게 농장 경영수업을 시키는 한편 경학원 이사 집안과 혼인함으로써 봉건 가정의 안팎을 다졌다고 하겠다.

김우진은 그러나 이미 구마모토 시절부터 가부장 수업 바깥에서 취향을 드러내고 적성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구마모토 시절, 김우진은 본격적으로 시 습작을 시작했고 영어 우등생으로 영어 교사로부터 귀염을 받았다. 그리고 1919년 드디어 와세다 대학 예과를 거쳐 1920년 영문과에 들어간다. 1924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는 졸업논문으로 영문 논문 <Man and Superman: a Critical Study of its Philosophy>을 제출했다.

구마모토의 시 습작 시절을 거쳐, 김우진은 대학을 다니면서부터는 연극에 빠져들었다. 1920년에는 조명희, 홍해성, 고한승, 조춘광 등 한국 문학사-연극사 초기의 인물들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을 조직해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희곡과 시의 창작 그리고 평론에도 몰두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졸업 후 1924년 목포로 귀향해서는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에 취임하는 등 집안일로 보이는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마르크스와 다눈치오와 스트린트베리와 버나드 쇼와 루이지 피란델로와 유진 오닐과 카렐 차펙을 읽으며 새로운 시대를 호흡하던 이 대지주의 아드님 겸 예비 가부장은 자신이 몸담은 가정과 사회 자체를 봉건의 질곡으로 여겼다. 쓴 글 곳곳에 드리운 답답함” “우울의 그림자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의 예고편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답답함” “우울에 지펴 그저 울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치고나갈 때는 치고나간 평론가였다.

예컨대 김우진은 1926년에 이미 유진 오닐의 대표작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구성은 상당한 극적 발전을 갖추었다. 첫째로 <안나 크리스티>에 비해서 부자연한 곳이 없이 극히 자연스러운 기분으로 욕망의 쟁투가 불가피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점, 또 애비의 성격 및 액션이 균형을 얻어 놓은 점, 순실한 이벤의 성격이 죽은 어머니의 유령에서 벗어나 가지고 참사랑에 희생을 해가는 경로가 훌륭하게 좋다는 평을 부칠 만큼 앞서 나간 눈 밝은 평론가였다. 참고로 <느릅나무 밑의 욕망>1924년 초연작이다.
또한 로보트라는 아이콘을 만든 체코 극작가 카렐 차펙에 대한, 또 차펙을 낳은 체코 연극사에 대한 김우진의 평론은 체코의 현역 문학 연구자 즈뎅까 끌뢰슬로바가 차펙 학을 위해서라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인정한 바 있다.

새것에 대한 감식안에서도 김우진은 남다른 점이 있었다. 김우진은 1926<조선지광朝鮮之光>에 발표한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조선문학이 있은 지 약 10년이다. [중략] 10년의 조선문단 역사가 한편에서는 새 맹아를 가졌으면서도, 10년 전의 당시보다 지금은 늙어빠진 문인들의 압도에 그 맹아의 출현을 촉진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중략] 오늘의 새 인생관, 새 시대의식, 새 세계의 창조를 요구할 때, 이광수류의 공중누각의 이상주의가 만연함을 방관하고 있을 수가 있을까. [중략]

이광수의 인생에 대한 태도의 특색인 안이한 인도주의, 평범한 계몽기적 이상주의, 반동적인 예술상의 평범주의는 이러한 인생에 대한 통찰의 부족으로부터 왔다. 더구나 그는 이러한 인생의 평범주의에 앉아서 오늘 조선문학도 그러한 평범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 평범이란 그의 말 속에는 다만 한가한 가정의 한가한 소일거리가 될 만한 문학이라야 영구 불변한 가치를 갖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중략]

조선이 지금 요구하는 것은 형식이 아니오, 미인이 아니오, 재화(才華_화려한 재주)가 아니오, 백과사전이 아니오, 다만 내용, 거칠더라도 생명의 속을 파고 들어가려는 생명력, 우둔하더라도 힘과 발효에 끓는 반발력, 넓은 벌판 위의 노래가 아니오, 한 곳 땅을 파면서 통곡하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

_김우진,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하라>에서


그때까지 대중에게 이광수의 지위는
절대였다.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할 새것의 선도자였으니까. 그러나 김우진의 눈에 걸린 이광수의 후진성은 매장해 마땅할 그 무엇이었다.

읽으며, 극단을 꾸리며, 시대를 고민하며, 미국-영국-이탈리아-체코 작가들의 작업까지 두루 살폈던 김우진은 희곡 창작에서도 시대를 앞서나갔다. 가정사와 얽힌 자신의 고통을 아로새긴 희곡
<두더기 시인의 환멸>, 목포 유달산 아래 빈민굴 속 사창가를 드라마에 아로새긴 희곡 <이영녀>, 베르디 오페라의 패러디까지 포함한 전위적인 실험극 <난파>, 그리고 표현주의 실험극 <산돼지>에 이르기까지, 김우진은 가정과 사회의 질곡 아래서도 생명력과 반발력과 통곡하는 부르짖음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사력을 다하다 끝내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최후 또한 극적이었다. 창작과 글쓰기에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1926, 날짜까지 부치면 192684, 김우진은 극단 생활 중 알게 된 당대 최고의 인기 연예인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한다. 둘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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