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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는 18세 이후 저널리즘에 발표한 글 자체가 본격적인 이력서, 연대기 자료, 전기 자료가 되는 글쟁이다. 그가 스스로 말한 자신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자료는 일체 모아 봐야 다음 두 조각이 전부인 듯하다.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어머니 슬하에 나는 행복된
소년이었습니다. 20세 전후의 청년시대 중학교를 5년급에 집어던지고 난 지 2년 후 어머니도 돌아가고 자산도 파하고 나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서울 거리를 정신나간 사람처럼
헤매였습니다. 괴로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한 행복에 불탔습니다.
_<삼천리문학>, 1938년 1월호에서
열아홉 살 때 가정의 파산과 더불어 그의 평화한 감상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_“어떤 청년의 참회”, <문장>, 1940년 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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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195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는
“1908년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4, 5세 때 아버지가 소기업을 경영하여 17, 8세 때까지 소시민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다/“1921년부터 경성시에 있는 보성중학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문학에 흥미를 느껴 시를 쓰기
시작했”다는 진술을 남기기도 했다(이 재판의 결과 임화는 이승엽, 이강국 등 친박헌영-남로당 세력과 함께 사형당한다).
소략한 자료를 보면, 임화는 선대의 출신이야 어떻든 유년 이후 청년기 직전까지는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낸 듯하다. 보성중학교에서는 후일 남로당 선전 및 조직의 맹장이 된
이강국, 시인 이상, 평론가 이헌구 들이 동기였고 시인 김기림, 평론가 김환태, 카프 이론 투쟁을 선도했던 평론가 조중곤 들이
1년 후배였다.
이후 집안의 파산을 맞은 임화는 1925년 17세쯤 졸업 직전에 학교를 자퇴한 듯하다. 어머니가 돌아간 때도 이 즈음인 듯하다. 그러나 임화는 집안이고 학교고 간에 무언가에 지펴
있었다. “나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서울 거리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매였습니다. 괴로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한 행복에 불탔습니다”라는 회고에서 보이는 “정신 나간 사람의 행복”이란 표현이 참으로 의미심장하거니와 임화는 그때 이미
“표현”과 “인정투쟁”에 지핀 정도를 지나 불타고 있었을 것이다.
임화는 1926년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본격적인 글 생산을 시작한다. 1926년 열여덟 살 때의 시는 유치했지만 평론 <근대문학사에 나타난 연애> <위기에 임한 조선영화계> 두 편은 심상찮다. 임화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근대와 연애를 서술 항목으로 포착할 안목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예술/산업/오락 어느 면에서나 당대 최신 형식이자 갈래인
“영화”를 이미 노려보고 있었다. 이후 임화는 1928년 영화 <유랑> <혼가> 들에서 주연 배우를 맡았고, 1943년 1월부터 1944년 12월까지 조선영화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근무하면서는
<조선영화연감> <조선영화발달사> 편집을 맡았다. 이렇듯 임화는 문학 부문뿐만 아니라 영화 부문에서도
평론, 연기, 자료 정리를 두루 맡아 해내며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그의 시는 1927년부터 꽃피기 시작한다. “임화林和”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와
겹친다. 임화는 이 무렵 다다이즘 시를 쓰는 한편 카프에 가입했고 무산계급문학에 대한 관심을
본격화한다. 앞서 소개한 <지구와 ‘빡테리아’>와 함께 이 시기 임화 창작 경향을 대표하는 시
<曇―一九二七: 작코·반젯틔의 命日에>를 몇 구절 보자. “다다이즘” 시라, 다다이즘의 난해 분위기를 맛보시라고 발표 당시의 표기를
살렸다. 어휘 및 한자 풀이는 다음 글에서 부기하겠다.
뿌르죠아지의 XX―
1918
이백만의 푸로레타리아를 웰탄 요새에서 XX한
그놈들의 XX행위는 惡虐한 수단은
스팔타키스트의 용감한
투사
우리들의 ‘칼’, ‘로―사’를 빼앗었다.
세계의 가장 위대한
푸로레타리아 동모를
혁명가의 묘지로 몰아너었다.
그러나 강철같은 우리의 戰列은
X人者―그들의 暴虐도 궤멸케 하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아즉도 그놈들은
완강하다
그놈들의 虛構手段과
XX행위는 아즉도 地球의 도처에서 범행되어간다
1917―태양이 도망간 해
세계의 우리들은 8월 20일 地球發電報를 작성하였다.
제1의 동지는 뉴욕 사크라멘트 등등지에서 수십층
死塔에 폭탄세례를 주었으며
제2의 동지는 휜랜드에서 살인자 米國의 상품에 대한 非買同盟을 조직하였고
제3의 동지는 코―펜하견에 아메리카 범죄자의 대사관을
습격하였으며
제4의 동지는 암스텔담 궁전을 파괴하고 군대의 총 끝에 목숨을
던졌고
제5의 동지는 파리에서 수백명 경관을 XX하고 다 달아났으며
제6의 동지는 모쓰코바에서 치열한 제3인터내슈낼의 명령하에서 대시위운동을
일으키었고
제7의 동지는 도―쿄에서 XX者의 대사관에 협박장을 던지고 갔으며
제8의 동지는 스이스에서 지구의 강도 국제연맹본부를
습격하였다
(그때의 그놈들은 한장의 二白兩짜리 유리창이 깨여진 것을 탄식하였다―눈물은 廉價다)
오오 지금 세계의 도처에서 우리들의 동지는 그놈들의 폭압과
XX에 얼마나 장렬히 싸화가고
있는가
그러나
인류의
범죄자
역사의
도살자인
아메리카―뿌르죠아의 정부는
사랑하는 우리의
동지
세계 무산자의 최대의
동모
작코, 반젯틔의 목숨을 빼엇었다
電氣로―
(푸로레타리아―트의 發電하는 電氣로)
_임화, <曇―一九二七: 작코·반젯틔의 命日에>에서
이 작품은 카프 도쿄 지부에서 발간한 <예술운동> 창간호에 발표되었다. 발표 당시 1927년 8월 28일에 탈고한 것으로 부기되어 있다. [계속]
*사진은 1932년 첫 부인 이귀례와 함께 찍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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