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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鄭芝溶, 1902~?). 어느결에 독서와는 영영 인연을 끊어버린 아저씨나 아줌마라도, 내가 한국어와 무슨 상관이 있소, 정신으로 잘살고 있는 십대 껄렁패라도 그 이름만큼은 알고 있는 시인 정지용. 이 사진은 정지용이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십대 말 또는 삼십대 초에 찍은 것으로 짐작된다.




아저씨아줌마에서부터 십대 껄렁패라도 그 이름을 기억하게 된 데에는 그의 시 <향수>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노래와 교과서에 새겨진 대표적인 한국어문학사 유산 <향수>. 읽지 않고 넘어가면 섭섭하리라.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_정지용, <향수> 전문


나게는
작품성을 논할 능력과 자격이 없다. 그러나 감동에 대해 말하라면, “감동했다고 말하겠다. 또는 다음 예들이 있다.
 

얼골 하나 야
손바닥 둘 로
폭 가리지 만,

보고싶은 마음
호수 만 하니
눈 감을 밖에.

_정지용, <호수 1> 전문

 

절정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소모消耗된다. 한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옷 내다본다. 화문花紋처럼 판박힌다. 바람이 차기도 함경도咸鏡道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팔월八月 한철엔 흩어진 성진星辰처럼 난만爛漫하다.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 않어도 뻑국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긔서 기진했다.

_정지용, <백록담>에서

아득한 옛날에, 상고할 길 없는 옛날에 한국어의 역사가 시작되고, 어느새 한국어를 이렇게 쓰고 살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어의 역사 안에서 한글이라는 문자의 역사까지 발생했다.
먼 옛날에 물려받아 오늘날 일상놀이문학예술교육출판언론행정 어느 분야에서든 널리 쓰게 된 말이 보다 세련되길 바라는 마음, 보다 깊이 있는 표현에 육박하길 바라는 마음은 지극히 당연해서 무슨 설명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말하자면 정지용은 그 세련, 그 육박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더구나 제국주의와 파시즘이 민족어 사용조차를 허용치 않은 시대를 지나며 민족어를 다듬고 이만한 작품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들을 발굴해 문단에 올린 공 또한 기억해야 하리라.

제국주의 시대, 파시즘 시대에 그에게도 똥물이 튀었다. 앞서 이광수의 얼굴과 함께 문인투서사건을 소개했지만, 정지용은 창씨개명과 관련해 이광수의 집으로 비난 투서를 보냈다는 혐의를 받아 일제 경찰에 의해 구류를 사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1939년 이광수를 회장으로 해 결성된 부일선전기관인 조선문인협회(1943년 조선문인보국회)에도 이름을 올려야 했다. 여기 이름을 올린 덕분에 종종 구설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 시대에 이름 빼앗기기는 어쩔 수 없는 똥물이었다. 적어도 정지용은 이광수나 김동환과 같은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는 휘문고보(해방 전)와 이화여대 및 서울대(해방 후)에서 교편을 잡으며, 몇몇 잡지사와 경향신문(해방 후 잠시 주간으로 재직)에서 활동하며, 평생을 오로지 타고난 교사로 글쟁이로 시인으로 살았을 뿐이다. 타고나기를 현장 활동가 체질이 아니었던 정지용은, 제국주의와 파시즘의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 그저 침잠해 있었을 뿐이다.

<시경>과 한시와 영문학 교양을 한껏 호흡하며 한국어에서 노닐던 이 시인은, 그러나 해방된 마당에서는 거센 말도 내뿜었다. 미소공위, 쌀 유통, 통일, 민족 반역자 숙청에 관련해서 말이 거세졌다. 아래는 그 한 예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온상이고 또 그들의 최후까지의 보루이었던 815 이전의 그들의 기구이 기구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타도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오.
혁명을 거부하고 친일 민반도(民叛徒: 민족반역자패거리) 숙청을 할 도리 있거던 하여 보소.

_정지용, <민족반역자 숙청에 대하여> 전문

해방공간에서, 정지용은 합리적인 남북통일을 꿈꾸었던 듯하다. 정치적으로는 김구와 여운형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듯하다. 1946년에는 좌익 문학단체인 문학가동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사단은 여기서 생겼다. 남한 정부는 정지용을 악질적인 사상검열조직인 보도연맹에 묶어버렸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나자, 한쪽의 주장에 따르면 19507월에 좌익계 제자들에 의해 납북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월북했다고도 한다.

1995102일치 통일신보에 정지용의 3남 정구인鄭求寅의 기고문이 실렸다. 당시 북에서 방송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정구인은, 기고문을 통해 정지용이 북으로 오던 중 소요산 기슭에서 미군의 비행기 기총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또 정지용의 발걸음에 대해서는 남조선위정자들은 나의 아버지가 납북당했다는 악선전을 벌인다며 화를 냈다.

남한 주민으로 살면서, 2년이나 지나 남한 언론을 통해 통일신보 기고문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지용의 장남 정구관鄭求寬죽은 줄만 알았던 동생의 소식을 확인하니 꿈만 같다면서도 다만 동생의 기고문을 빌미로 새삼스레 월북설 등이 제기될까 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9971011일치).

월북이나 납북이나 정지용 시어에는 없는 말이다. 북의 3남의 날선 수사, 남의 장남의 구차한 걱정이 어느 쪽이고 속상한 풍경을 지어낸다. 속상하고, 또 퍽이나 쓸쓸한 풍경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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