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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맹목적으로 믿어온 사람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정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법이 정의와 일치한 적은 한번도 없다.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철학적 통찰을 빌리자면 정의는 항상 ‘법 너머’에 있다. 역사적으로 정의는 현존하는 법보다는 법의 바깥에서 존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르틴 루터 킹은 ‘버밍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서 “정의로운 법은 복종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지만 정의롭지 않은 법은 불복종하는 것이 정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킹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나라 노동자들 입장에서 도덕적으로 따르고 싶은 법보다는 목숨을 걸고라도 저항하고 싶은 법이 더 많다고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지난 2월 민주노총에서 총파업을 결의하자 경영자총연합회에서 정부에 법과 원칙을 주문했다. 하지만 경총에서 법과 원칙의 강조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속내는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총의 경영계에 대한 행동지침 말미에 이런 표현이 있다. “최근 대법원의 업무방해죄 인정요건이 까다로워지고 있으니 손해배상을 위해 구체적 채증을 통해 책임을 추궁할 수 있도록 할 것.”

일찍이 독일의 사회문화 비평가인 발터 베냐민은 법의 본질을 폭력으로 보면서 법의 목적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데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노동력이 유일한 생산수단인 노동자들이 시장폭력에 합법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대응수단은 노무제공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중삼중의 법적제한에 묶여 노동자들의 합법 파업은 흔히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에 비유되고 있다. 노조가 법의 테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식물노조’로 기능하는 일뿐이라는 노동계의 자조는 과장된 말이 아니다. 특히 대규모 사업장보다는 중소사업장, 직접고용보다는 간접고용 노동자가 노동3권이라는 무기에 손을 대려는 순간 법의 바깥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법의 바깥에는 해고와 계약해지, 업무방해죄와 손배폭탄이 기다리고 있다.

도서 '정의가 곧 법이라는 그럴듯한 착각' (출처 : 경향DB)

헌법재판소가 청소용역 회사를 상대로 2014년 1월1일부터 5년간 적용하기로 한 특수계약조건은 노동3권이 거세된 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준다. 헌재는 건물 내에서 일절 쟁의행위를 못하게 하면서 최저임금법을 위반하고 있다. 하지만 청소노동자들이 헌재를 상대로 쟁의행위를 하는 순간 굳이 특수계약조건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불법파업에 몰릴 수밖에 없다. 헌재는 노조법상 이들을 고용한 사용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 기본권의 최후의 보루라는 헌재가 이럴진대 다른 곳은 더 들여다볼 것도 없다. 독일 시인 브레히트는 ‘바이마르 헌법 2조’라는 시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이 땅의 노동자도 마찬가지 심정일 것이다.

마르틴 루터 킹의 표현을 다시 빌리자면 어느 한 곳의 ‘비(非)정의’는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노동현장의 비정의는 미래 노동자들을 길러낼 교육현장을 오염시키고 있다. ‘악법도 법’이라는 왜곡된 관념이 진리를 반성과 성찰이 아니라 암기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2014년 수능세계지리 18번 문항과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가 문제 없다는 판결이 동일한 재판부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교과서가 정답의 기준이 돼야 한다’는 판결은 ‘법에 해직자는 조합원이 될 수 없다고 나와 있으니 법외노조 통보가 문제가 없다’는 논리와 그대로 오버랩된다. 교과서에 있으면 진리요, 법에 있으면 정의가 되는 것이다. 신임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국회 청문회에서 ‘전교조와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겠다’고 했다. 하지만 악법을 대화로 풀겠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니 기다려 달라는 의미나 다름없다. 어디서 지겹게 많이 들었던 얘기다. 기업의 사정은 언제 나아지고 노동자들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강진구 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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