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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베란다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짐을 정리하다 생각지도 못한 걸 발견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썼던 앙케트와 일기장. 친정아버지가 내 물건이라며 박스째 가져다 놓으셨던 걸 뒤늦게 풀어본 거다. 근 28년 만에 열린 나의 1988년. 첫 모의고사 결과에 대한 실망, 좋아하던 지리 선생님에게 내 존재를 확실히 알릴 방법에 대한 고민, 처음 탄 새마을호에서 느낀 놀라움과 감탄, 갑자기 나를 피하는 듯한 친구 심리분석 등 손발 오그라드는 유치함과 여릿한 감성으로 뒤범벅된 일기장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보다 더 재미있었다. 한참을 보다 멈춘 부분은 9월의 어느 날이었다.
“혀를 어떻게 깨물어야 죄가 안될까. 성폭행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가 온 힘을 다해 저항했는데. 반항을 해도 혀까지 자른 건 잘못했다고 한다. 그럼 그런 상태에서 혀가 안 잘릴 정도로만 깨물어야 할까. 정말 답답한 일이다. 선생님은 나중에 우리들이 어른이 될 때쯤이면 좋은 세상이 될 거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판검사가 되라고 했다. 내 생각엔 그 판사와 검사의 딸들이 이런 일을 당해봐야 세상이 고쳐질 것 같다.”
몇년 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던 성추행범 혀 절단 사건. 여고생의 흥분과 분노는 짧은 글에 삐죽삐죽 드러나 있었다. 함께 일기를 본 딸아이는 “엄마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네”라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시절 치밀었던 분노, 그리고 “여자가 술 먹고 밤 늦게 다니는 게 문제”라며 피해자를 탓하던 동네 아줌마들에게서 느꼈던 반발심 등이 기억의 한 자락을 타고 어렴풋이 떠올랐다.
대학시절 친구 자취방에 모여 이 영화를 비디오로 보던 우리들은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보은 사건’을 거론하면서 “도저히 여자가 살 나라가 못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가 1992년이었던 것 같다.
한동안은 믿어왔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가치관이 진화하고 발전할 것임을. 지난해 캐나다 트뤼도 총리가 취임식에서 남녀동수라는 파격적인 내각을 구성한 이유에 대해 “2015년이니까”라고 했던 답변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갖는 상식과 당위의 수준 아닌가.
하지만 그 21세기 시곗바늘이 아직 한국에 와 닿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언제가 될지 짐작하기도 난망하다. 도대체 그동안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성들의 인권과 여성성은 유린과 희화화의 대상이 됐다. 동물적 본능과 눈먼 욕망은 자랑거리가 됐고 심지어 능력으로 추앙받는다.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소수 남성들의 관념에 머무르는 줄 알았던 단어 ‘여혐’은 일베나 소라넷으로 대변되는 창구를 통해 여성들의 일상을 위협하는 현실의 언어가 됐다. “남자들이 걱정하는 건 내 여친 ‘김치녀 아냐?’하는 수준이지만 여자들은 내 남친이 나 강간하면 어쩌지, 때리면 어쩌지, 헤어질 때 칼로 찌르면 어쩌지 하고 걱정의 수준이 다르다”는 한 트위터리언의 글은 한국 여성의 현실을 드러내주는 진단이다. 소설 <도가니>에 묘사됐던 것처럼 ‘발정난 나라’에서 많은 이들이 불안에 떨며 딸을 키우고, 많은 여성들이 숨을 죽인 채 살아간다.
말도 안되는 이유로 약자를 성추행하고 능욕하는 이들이 국회의장·청와대 대변인·국회의원·고위 공직자가 되는 나라, 여성들을 잔혹하게 폭행하고 신체를 몰래 촬영하는 범죄를 저질러도 힘 있으면 용서가 되는 나라에서 무얼 바라겠나. 권력과 돈, 사적 욕망으로 발정난 지도층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라, 인생을 송두리째 유린당하고 짓밟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그런 파렴치한 이들에 의해 조롱받고 무시당하는 나라에서 우린 어떤 희망을 찾아야 하나.
박경은 | 대중문화부 차장 k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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