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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착한 딸, 어진 어머니

opinionX 2018. 11. 29. 13:45

나름 지역의 명문여고를 졸업한 아내에게 출신고의 교훈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을 일이 있었다. 그는 졸업한 지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착한 딸’과 ‘어진 어머니’라는 교훈을 기억해 냈다. ‘참된 일꾼’은 내가 찾아서 보여주자 곧 그것이 맞다고 답했다. 그 교훈이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는지 물어보니 “아니 별로…”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실 아내가 졸업한 W여고의 교훈 3가지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고이든 남고이든 굳이 그 교훈에 ‘○○한 딸·아들’같이 특정 성별을 내세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착한’이라는 형용사는 권장될 만한 것이지만 그것이 여성을 수식하고 나면 그 뜻이 묘하게 변질되어 버린다. ‘든든한’이라는 형용사가 남성과 어울려 ‘든든한 아들’이 되었다고 상상해보면 더욱 한 단어의 훼손이나 오염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 딸은 착해요” “우리 아들은 든든하죠” 등과 같은 익숙한 결합은 단순히 국어사전에 명시된 의미를 넘어서, ‘훈’을 건네는 주체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사회적 욕망이기도 하고 가문(가정)이라는 소집단의 욕망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사회는 착한 딸들에게 많은 순종과 희생을 강요해 왔다. 착함을 강요받은 딸들은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받지 못했고 돌봄의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났다. 그들은 참된 일꾼이 되어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가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거나 형제의 학비를 보탰다. 1970년대의 이름 없는 어린 여공들은, 자라서 어진 어머니로서 착한 딸과 든든한 아들을 키워내는 역할까지를 도맡았다.

<별들의 고향>(1973)이나 <영자의 전성시대>(1973)의 서사이고, 최근에는 <우리들의 누이>(2018)라는 소설에서도 이 시기의 여성들을 다루었다. 그런 젊은 날의 서사를 가진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사회는 그들에게 그만한 빚을 지고서도 여전히 염치없이 그 훈을 다음 세대에게까지 전하는 데 열심이다.

나는 나의 자녀가 (특히 딸이) 3년 동안 ‘착한 딸’, ‘어진 어머니’, ‘참된 일꾼’이라는 훈을 보며 등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새겨진 큰 바위를 보는 일도, 그것이 명시된 교가를 부르는 일도 없기를 바란다.

물론 나는 그가 착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나와는 달리 어진 부모가 되기를 바라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참된 노동자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순종하거나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하지 않기를 더욱 바라고, 결혼과 출산을 온전히 자신이 선택하기를 더욱 바라고,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기를 더욱 바란다. 그러니까 사회적 개인이 아닌 온전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른 공립여학교의 교훈이나 교가를 직접 찾아보면서, 나의 아내가 졸업한 학교의 사례가 특별한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성실, 순결, 봉사’라든가 ‘겨레의 참된 어머니가 되자’라든가 ‘여성의 착한 꿈은 여기에서 자라고’와 같은 훈들을 보면서, 나는 아내에게 그만 미안해지고 말았다. 별로 이상한 교훈도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생명을 다한 줄 알았던 언어들은 학교에 모두 모여 있었다.

그런데 W여고는 몇년 전에 교훈을 바꾸려고 시도한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 교감으로 재직했던 모 선생께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도 ‘착한 딸, 어진 어머니, 참된 일꾼’이라는 교훈이 낡은 것이라 생각해 바꾸고 싶었다. 학생·학부모·교사 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901명이 찬성하고 402명이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교훈 개정을 위한 공모전을 열기로 했으나 총동문회에서 만장일치로 반대했다는 것이다. 항의하기 위해 학교를 찾아온 졸업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시기 지역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동문회는 “시대가 변해도 교훈은 변치 않는 학교의 전통”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제는 노년이 되었을 W여고의 초기 졸업생들은 착한 딸로서, 어진 어머니로서, 그리고 참된 일꾼으로서 자신의 삶과 삶의 태도를 형성해 왔을 것이다. 그 언어에 익숙해진 몸은, 그것을 쉽게 ‘전통’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다. 훈이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기에 익숙해지고 만다.

나는 주변의 훈을 바꿀 것을 모두에게 제안하고 싶다. 교훈뿐만 아니라 사훈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일상공간의 모든 훈을 바꿀 필요가 있다. 순결, 정숙, 우리는 남들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일한다, 래미안캐슬아트빌, 교수마을과 같은 기괴한 언어들이 여전히 이 사회를 포위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이 되어서는 안 되고, 특히 그 언어로 자신의 몸을 형성해 갈 어린 세대들(학생들)에게 전해져서는 안 된다.

한 시대를 마감하는 일은 누군가를 구속하고 승리를 선언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우선, 주변의 언어를 전복시켜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해 그 훈들을 바꾸어야 한다. 그에 더해 당신이 졸업한 고등학교의 교훈은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 당신의 아이들이 여전히 그 훈을 노래하고 교정을 거닐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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