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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직설

5·18과 남성성

opinionX 2018. 12. 6. 11:00

일부 커뮤니티에서 내 저서 <한국, 남자>가 5·18민주화운동을 모독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 근거는 책의 목차 중 ‘남성성의 극한: 80년 광주의 공수부대’라는 부분이다. 놀랍게도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목차가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발을 하겠다거나 5·18기념재단에 제보를 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중이다.

나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군이 치른 3번의 ‘전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내전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이다. 두 번째는 희박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박정희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이다. 그리고 세 번째 전쟁이 바로 신군부가 정당성 없는 군부독재를 이어나가기 위해 광주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벌였던 5·18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 광주의 시민들을 학살했던 계엄군이다. 생각해보면 계엄군의 대부분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징집된 병사들이었다. 일부의 이탈이나 저항이 존재했지만 계엄군은 마지막까지 대오를 유지하며 광주의 시민군을 학살하고 도시를 무덤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징집된 병사들, 즉 군복무가 끝나면 다시 시민이 될 사람들이 이런 잔혹하고 부정의한 일에 항의하지 않고, 그 명령을 수행했는지를 반드시 물어야 한다.

물론 그들은 이탈하면 죽인다는 상관들의 협박을 받았고,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병사들을 골라내 때리고 기합을 주는 내부의 폭력에 시달렸으며, 광주의 시민들이 다 간첩이라는 가짜정보를 세뇌당하듯 주입받았다. 또 진압 과정에서 동료 병사가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며 증오심을 키웠고, 산속에서 숙영을 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럼에도 왜 사람들을 때리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죽였느냐고 묻지 않을 수는 없다. 그로부터 내가 발견한 것은 한국 사회의 권력자들이 만들어 내고자 했던 남성성의 한 극한이다. 이는 18세기 무렵 최초의 근대적 남성성이 등장했을 때부터 모든 권력의 꿈이었다. 의문을 갖지 않는 건장한 육체들,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고, 더럽고 잔인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들. 국가는 이 남자들을 모든 권리를 가진 일등시민으로, 나머지 비남성들을 이등시민으로 만들고 법과 제도에서부터 일상의 작은 부분까지 차별대우했다. 그렇게 일등시민이 된 남자들은 군대와 일터와 사회에서 권위에 복종하고, 대신 이등시민들을 착취하면서 실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상대적 우위를 누렸다. 이들의 충성은 요란한 군복을 입은 늙은 장군들과 비단옷을 입은 부자들에게 바쳐졌고, 이들은 평범한 남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착취하면서 돈과 명예를 독식했다.

이것이 내가 이야기하는 ‘남성성’이다. 그러니 나로선 대체 무슨 상상을 했는지 알기 어렵다. 남성성은 좋은 것인데 그것의 극한이 공수부대라고 했으니 광주를 모독했다고 생각했을까? 광주민주화운동이 한국의 ‘역사’로 편입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두 번의 정부를 거쳐서야 가능했다. 아직도 미처 밝히지 못한 진실들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여전히 일각에서는 광주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날조를 유포하고 있으며, 과거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에 기념행사 때마다 크고 작은 수모를 겪어야 했다. 단순히 ‘민주화운동’이라는 화석화된 말로는 광주를 알 수도, 지킬 수도 없다.

나는 오히려 묻고 싶다. 대체 광주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에 대한 다른 관점과 해석이 광주에 대한 모독이란 말인가? 그저 마음에 안 드는 책에 광주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는 이유만으로 허수아비와 싸우는 꼴이야말로 광주를 빌미로 누군가를 괴롭히려는 심보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아직도 신고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얼마든지 신고하시길. 참고로 5·18기념재단은 기부도 받고 있다. 뭐가 더 생산적일지는 알아서 판단하기 바란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한국, 남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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