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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아이는 겨울방학 하자마자 베트남 갔어, 엄마하고. ○○이는 며칠 있다가 갔다 온다나 봐.” 큰아이가 다니는 학교, 같은 반에는 꽤 여러 명, 부모가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다. ‘다문화가정’이라고 불리는 집. 엄마가 베트남이나 필리핀에서 나고 자랐다. 서너 명 가운데 한 명꼴로 그렇다. 나라 전체로 보자면 초등학생 서른 명 가운데 한 명, 한 반에 한 명쯤 그런 친구가 있고, 점점 많아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두 나라 말을 익힐 가능성이 큰 아이들이 많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이중언어라거나, 바이링구얼이라고 하는 경우. 모어가 둘인 사람. 물론 한 나라 말만 배울 수도 있고, 아마도 그런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적어도 이 동네 아이들은 그렇다.

아이가 자라면서 처음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자기 뜻대로 몸을 놀리는 것과 말을 익히는 것이다. 말문이 트여야 생각도 정리할 수 있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내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오랫동안,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말만 써 왔기 때문에, 그만큼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외국어를 배우는 건 어려웠지만.

다문화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 가운데, 늦게까지 말문이 잘 트이지 않는 것 같은 아이들이 가끔 눈에 보일 때가 있다. 대화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만, 쓰는 말이 단순해 보이는 아이들. 누가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으면, 이야기 졸가리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아이들. 웅크리고 있다.

건너건너 아이들의 엄마가 시집에서 지내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이중언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지. 엄마가 자신의 언어로 아이와 편히 이야기한다는 집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바이링구얼로 자랄 가능성이 있었던,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한 가지 말을 잘 익히는 것마저 어려워지는 형편에 빠진다. 엄마의 말이 무시당하는 만큼, 자신의 삶이 차별과 멸시와 외면에 맞닥뜨리기 쉬운 것처럼, 말도 마찬가지다. 물론 어른들 때문에 말문이 트이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자리에도 있다. 이를테면 열심히 영어 유치원을 다녔다거나, 아주 어린 나이에 무리한 외국어 공부(모어로 익히는 것이 아닌!)를 한 덕분에 언어장애를 겪는 아이들. 어림잡기로는 이 아이들의 숫자 또한 ‘다문화가정’ 아이들만큼 된다고 한다.

다문화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점점 늘어날 테고, 어느 반이나 교실에서 이런 아이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지난 한 해 세상은, 사람들 마음은 얼마나 달라졌나.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광경은 새 정부가 들어서고 끊이지 않았다.

지난 연말에 책을 두 권 펴냈다. 책이 나올 무렵 <언젠가 새촙던 봄날>의 저자 박선미는 일이 바빠 며칠 밤을 새우고 있다 했다. 아이들 교과서를 매만지고 있다고. “선생님께서 교과서 교정을 보고 있어요? 정말?” “2018년에 쓸 거, 초등 3·4학년 아이들 보는 국어 교과서 하나예요. 이미 집필은 다 끝난 거를 받아서, 우리말 말법에 맞게 고치고 있어요.”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갑작스럽게 이 일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껏 이오덕 선생님, 권정생 선생님한테 배우고, 그 뜻을 이어 온 단체에서 다른 어느 책도 아니고 교과서를 손보는 날이 올 줄이야. 단지 교정 교열만 보는 것이라고는 했지만, 아이들이 말글을 익히고 삶을 가꾸는 것에 온 힘을 다했던 선생들이니, 내년 아이들 교과서가 얼마나 달라졌는가 볼만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씩, 학교에서도 달라지는 구석이 있겠지. 선생으로, 스승으로 아이들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리고 아이들은 제 목소리를 내는 데에 어려워하지 않고, 조리 있게 말문이 터지는 한 해가 되기를.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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