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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 이런 빤한 문장도 언제까지 가능할까. 우리 동네 아파트 자리만 해도 나 어릴 때는 논밭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논에 물을 가둬놓고 겨울방학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스케이트장도 있었다. 택지 조성하기에 가장 만만한 땅이 들판이다. 싸고 평평하니까. 도시의 아파트 생활자들은 사실 농촌에 기본적으로 부채가 있는 셈이다. 또 다른 한편 푸른 들판이 아니라 ‘하얀 들판’이 전국에 펼쳐지고 있다. 돌아다니다 보면 분명 논이어야 할 땅에 비닐하우스가 들어와 있거나 비가림막 시설을 한 포도밭 등이 눈에 들어온다. 쌀농사 지어 밥 먹기가 쉽지 않은 것이 농촌의 현실이다 보니 논에서 밭으로 많이 전환되곤 하고, 그 자리엔 예외 없이 비닐하우스가 들어선다.
오랜만에 쌀값이 반등했다. 지난해 쌀 한 가마니(80㎏)에 12만원대였는데 올해 17만원대로 올랐다. 쌀값 고공행진을 지적하며 몇몇 경제신문은 ‘쌀 과보호’ 정책 때문에 도시의 서민들은 죽어나간다고 말한다. IMF 이후 쌀값이 가장 큰 폭으로 상승했다는데 이 말은 뒤집어 보면 그동안 물가상승률 이하로 쌀값이 주저앉아 있었단 뜻이다. 이유야 여럿이다. 한국 농업이 미작 중심 구조로 내달려 왔기도 하려니와 쌀은 핵심 식량이므로 수매제도와 같은 국가의 관리 대상이었다. 육종 기술과 재배 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고, 수확량도 많이 늘어났다. 그런데 밥 말고 먹을 것들이 지천인 세상이니 쌀 소비량은 많이 줄었다. 한 가마니에 17만원이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요즘 누가 쌀을 한 가마니씩이나 먹나. 이미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이 한 가마니에 미치지 못한 지 오래고, 작년에는 60㎏ 선도 무너져 59㎏ 정도다.
선거구의 의미만 남아 소멸되지 않고 버티는 농촌이 좀 귀찮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유수한 정치인들의 농촌 선거 슬로건은 ‘쌀값 보장’이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다 쌀값을 보장한다고는 했지만 지켜지진 않았다. 2015년 11월, 서울 광화문까지 올라와 선거 때 ‘당신들’이 약속했던 쌀값을 보장하란 구호를 외치다 보성의 한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끝내 숨을 거뒀다. 쌀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갔다. 농민들이 요구하는(그리고 정치인들이 약속한!) 20만원대의 쌀값 보장은 밥공기로 따지면 한 공기당 300원을 보장해 달라는 이야기다. 갑자기 오른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17만원선을 유지했던 쌀값이 주저앉은 것은 지난 정권 때의 정책 실패 때문이고, 이제야 값을 회복한 것일 뿐이다.
얼마 전 문재인 정부는 쌀 생산 감축을 목표로 ‘쌀 생산조정제도’를 공표했다. 논 타작물 전환 지원 사업인데 논에다 쌀 말고 다른 작물을 심으면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의미다. 지난 20일이 신청 마지막 날이었지만 감축 목표 면적의 70%에 미치지 못했다. 이는 농촌에서 전작이라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똑똑이들이 쌀값을 자꾸 보장해 주니 농민들이 계속 쌀농사를 고집한다고는 하지만, 논은 ‘인공습지’이기도 하다. 습지를 밭으로 만들려면 그만큼 인력과 돈이 들어가야 한다. 논에다 콩이나 가축용 조사료를 심으라고 강권하지만 농촌에서의 생존 비법은 사실 이거다. ‘정부가 시키는 일과 반대로 해야 살아남는다.’ 쌀농사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최대 쌀 생산지인 전라도에 딸기 재배가 근래 확 늘었다. 그 여파는 농지 값도 비싸고 날씨도 추운 경기도 북부권의 딸기 농가에 타격을 준다. 쌀에서 과수로 돌아서면 경상도의 복숭아와 충청도의 포도가 싸우는 꼴이 난다. 쌀은 곧 딸기고 포도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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