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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과 내 경험의 차이는 너무 커서 설명이 아예 안되는 것들이 태반이다.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아 볶아 먹었다거나, 개구리 다리를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엄마를 원시인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농촌에서 계절마다 잡아먹을 것들은 제각각이었다.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다슬기를 줍는 일은 여름, 겨울의 큰 놀이였다.

1월5일부터 시작된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가 27일 막을 내렸다. 2003년 처음 열릴 때는 화천군민 수만큼인 2만명만이라도 왔으면 한 축제였다. 하지만 개최 첫해 22만명 정도가 찾았고, 올해는 184만명을 화천으로 불러들였다.

한때 ‘축제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함량 미달의 지역축제가 넘쳐나던 때도 있었다. 1960년대부터 지역축제는 있어왔다. 춘향이나 논개, 이순신 등 국가 이념에 맞는 관변 축제를 만들어 관이 주도하고 주민이 동원되었다. 관 주도의 농촌 지역축제는 풍물장터와 연예인 공연을 하고 ‘특산물 아가씨’ 선발대회를 여는 식의 엇비슷한 내용이었다. 그러다 1995년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고 국정지표에 ‘문화진흥’이 등장하면서 지역축제의 활성화를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지자체마다 축제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화천 산천어축제’와 ‘함평 나비축제’를 꼽는다. 

‘산천어’는 1급수에 사는 담수어로 화천이 산천어를 축제 테마로 내세운 것은 청정한 자연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산천어는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멸종위기에 놓인 물고기였다. 열목어나 쉬리와 함께 자연다큐의 주인공 역할을 맡아왔다. 1970년대부터 당시 수산청 주도로 양식이 시도됐다. 이는 생태적 이유라기보다는 ‘고급 식재료’로 주목했기 때문이다. 1974년에는 관광 낚시터에 풀어놓기 위해 산천어와 송어를 교배해 ‘산천어 F1’이란 어종을 개발했고, 1990년대 들어서 본격 양식에 들어갔다. 화천 축제에 쓰인 산천어도 당연히 양식을 해서 풀어놓은 것이다.

결국 올해는 산천어축제가 동물학대와 생명경시를 부추기는 일이라며 축제를 막아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올라왔다. 여러 환경단체와 동물권 단체의 반대성명도 이어졌다. 양측의 주장도 팽팽하게 부딪친다. 물고기 잡기가 ‘생명경시’인지 ‘추억의 동심’인지로 갈린다. 축제의 규모가 개최 초기보다 훨씬 커졌고 관심도 높기 때문에 개선할 점이 분명 있고 새겨들을 만한 지적이다.

다만 화천에서 ‘산천어’를 테마로 축제를 꾸렸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고민해봐야 한다. 군사지역이어서 ‘군인 상권’으로 먹고살아야 하지만 남북관계가 꼬여 군인들의 외출이나 면회가 제한되면 지역경제가 어려워진다. ‘평화의 댐’으로 대표적인 관광지였던 파로호가 마르면서 관광객도 줄었다. 산과 물, 공기, 추위가 고장의 자산인 이곳에서 ‘산천어’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농한기에 주민 일자리가 생기면서 소득에 도움을 주고, 농산물 판매로 이어지면서 이 축제가 화천군민들에게는 중요한 행사가 된 것이다. 참여 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 또한 높아졌다는 연구도 나와 있다. 사람의 일은 복잡다단하다. 꼭 돈 때문만은 아니다.

농촌에서 농사만 지어서는 먹고살기 힘들다. 오래전부터 ‘향토축제’란 이름으로 축제를 부추긴 이유는 뭐라도 해보란 뜻이었다. 나비를 길러서 날리고, 산천어를 길러 얼음 강물에 풀 수밖에 없던 속사정이 풀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디에서든 또 잡고 먹고 할 것이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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