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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 신문사가 주관한 신춘문예 시상식에 참석했다. 미술평론 분야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경쟁을 뚫고 당선된 수상자들이 기뻐하고 들떠있었다. 앞으로 글을 써서 살겠다는 이들이다. 그 길이 과연 어떤 길일까? 아득하고 난감하다. 그래도 지금 세상에 책상에 고독하게 앉아서 어지러이 떠도는 상념을 글로 안착시키면서, 애써 문자 꼴을 더듬어가며 자신의 생각을, 음성을 전하려는 이들이 기특하기만 했다. 밥벌이가 되지 못하는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시나 소설 분야는 수백편 넘게 응모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미술평론은 기껏해야 스무편을 넘지 못했다. 미술인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나라에서 미술평론을 꿈꾸는 이들은 20명이 안된다! 하긴 오늘날 누가 미술평론을 하려고 할까?
미술평론가가 활동하려면 우선 매체가 있어야 하고 그 매체에서 글을 청탁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글이 미술계에 나름 영향력이 있거나 최소한의 울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미술계는 그 모든 것이 열악하기만 하다. 주요 일간지의 미술란은 미술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과 분석, 비평은 부재하고 그저 유명 화랑이나 미술관의 전시일정을 소개하는 정도에서 머문다. 국내 중요 상업화랑과 국립, 시립미술관 정도의 전시만이 거론될 뿐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기사들은 현재 어떤 전시가 중요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로 나가기 어렵다. 그저 소식이나 동정을 알리는 게시판 수준이다.
신문에 실린 미술기사가 대중들에게 작품을 보는 안목이나 최근 미술계의 흐름 등을 이해시키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당연히 신문매체에 미술평론가의 글은 거의 실리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텔레비전에서 미술계를 심층적으로 다루거나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진단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KBS에서 오래전 <명작스캔들>이란 꽤나 유익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지만 시청률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폐지됐다. EBS 라디오의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 역시 이명박 정권 때 영어교육방송으로 교체됐다. 방송에서 작가나 전시를 다룬다 해도 그 작품이 무엇인지, 미술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등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피상적인 상찬이나 작가의 과도한 자기주장, 자랑을 그대로 옮기는 수준이다.
미술평론가 윤범모 경원대교수와 경원대(가천대) 출신 작가들_경향DB
특히 케이블TV A&C의 한국작가 작업실 탐방이 그 대표적 예다. 작가의 작업을 모르니 제대로 질문할 수가 없어서 그저 감탄을 쏟아내고, 작가는 그런 진행자를 향해 자기 자랑만 잔뜩 늘어놓는다. 그런 방송은 미술에 대해 거의 아무런 말을 전해주지 않는다. 하나마나한 얘기들뿐이다. 전문적인 미술매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미술 전문잡지들이 몇 개 있다. 그러나 한 군데를 빼고는 나머지 잡지사는 필자들에게 거의 원고료를 주지 않는다. 못한다.
열악한 잡지사는 기자들이 거의 모든 기사, 리뷰를 쓴다. 평론가에게 청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전문성이 떨어지고 읽을 만한 내용이 드물다는 얘기다. 잡지사 자체가 운영이 어려우니 원고지 장당 7000원 정도의 원고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 원고료는 필자가 처음 원고를 쓰기 시작한 1990년도와 동일하다. 보통 작가론은 20장 정도 쓰는데 세금을 떼고 받는 돈이 12만원 정도 된다. 리뷰는 6장이니까 4만원 정도다. 결코 생활이 될 수 없다. 그나마 원고료를 주는 잡지사는 좋은 잡지사다. 원고료를 주지 못하는 곳은 아예 작가에게 부담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작가의 경우는 자신의 글이 잡지에 실리고 홍보가 된다고 여기니까 자기 돈을 내서라도 싣고 싶어 한다. 작가에게 부스비를 부담시키고 아트페어에 나가는 화랑이나 똑같은 경우다.
미술평론가로 등단해도 글을 쓸 곳이 없고 글을 써서 생활할 수 없다는 얘기다. 평론가의 전문성에 대한 대우도, 인식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미술평론에 누가 귀 기울이나? 미술계는 이제 자본이 움직이고 화상, 옥션 등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작가들 또한 평론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에게 절대적인 것은 시장이 되었다. 그 외에 나머지는 그저 장식에 불과하고 요식행위에 머무는 것이다. 그러니 미술평론가를 누가 꿈꾸기나 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면 스무편이 안 되는 응모편수가 결코 적은 게 아닌 것도 같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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