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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14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정답은 모두 그럴싸한 악당이 등장한다는 거다.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자는 ‘조커’라는 인물이다. 그는 악당치고는 특이한 면면을 가지고 있다. 조커는 자신을 지지하는 수백만명의 시민을 호위무사처럼 부린다. 언제나 활짝 웃으면서 범죄를 저지른다. 당연히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아무런 가책이 없다. 이 정도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던 그레셤의 법칙을 조커에게 대입해 볼 만하다.

산업사회가 등장하고, 인종차별이 횡행하고, 패권주의의 물결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조커에 버금갈 만한 실제 인물이 속속 등장했다. 파시즘의 대마왕 히틀러, 바그너와 미술창작을 좋아하던 자칭 예술인이었다. 우간다의 학살자 이디 아민, 무하마드 알리에게 도전장을 내민 권투선수였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변호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예술가, 운동선수, 법조인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지로 자신의 상품성을 높였다는 거다.

이들의 범행기록은 집요하게 배트맨을 괴롭히던 조커를 능가하고도 남는다.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는 무려 2700만명에 달한다. 당분간 히틀러를 능가할 만한 연쇄살인범은 핵전쟁을 제외하고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이디 아민은 8년간의 대통령 재임 시절 30만명에 달하는 대학살을 자행한다. 사형수의 머리를 잘라 냉장고에 보관했다니 사이코패스 명예박사 학위를 받고도 남을 만하다. 일본보다 부유했던 필리핀을 경제 후진국으로 추락시킨 마르코스.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하는 정적 베니그노 아키노를 공항에서 암살한다.

위에서 소개한 사고뭉치 외에도 국가통수권자라는 자리를 이용해서 만행을 저지른 이들이 수없이 많다. 뇌기능이 마비된 정치철학, 폭력에 대한 무감각, 악행을 선행처럼 행하는 독재자의 이중성은 조커와 매우 흡사하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무한권력과는 관계없는 취미나 직업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속였다는 거다. 히틀러의 대변자인 괴벨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고.

이들이 집착하는 정치의 민얼굴이 궁금해진다. 시작은 어렵지만 일단 쟁취하고 나면 지배자의 영혼을 쥐락펴락하는 이상한 생명체가 바로 정치다. 피지배자를 멋대로 조종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비판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만 자리보전이 가능하다. 폭력의 악순환을 즐겨야 자자손손 독재정치의 그늘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해질 나이가 돼서야 깨닫는다. 자신은 사람이 아닌 정치권력이 낳은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광장 민주주의의 결과물인 대통령 탄핵을 마무리한 지 5주가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선과 악이라는 두가지 명제에만 매달려 더 넓은 세상을 간과하지는 않았던가. 가십거리에만 집착하는 황색언론에 놀아나지는 않았던가. 탄핵이라는 화두 앞에서 소수의견을 일방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았던가. 행여나 위정자들의 후반전을 보면서 막연한 대리만족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점검이 필요한 시점이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쯤이었나. 나는 <크리스마스 캐럴> 연극의 주인공을 맡았다. 어떻게 하면 스크루지의 역할을 과장스럽게 표현할까에 집중했다. 돈에 환장한 늙은이의 모습에만 집중하다 보니 마지막 장면을 엉망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내게 스크루지란 영원히 악당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고약한 늙은이였다. 하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다른 스크루지를 연기해 보고 싶다. 선과 악의 중간지대를 오가는 인간스러운 스크루지를.

조커는 스크루지와 비교가 되지 않는 범죄의 상징이다. 그는 24시간 내내 악한 생각과, 악한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에게 가책이나 반성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현실세계에 출몰하는 제2, 제3의 조커가 보여주는 색깔은 노란색이다. 노란색은 환상이다. 스스로 환상을 거세할 줄 모르는 자의 삶은 불행하다.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악당 전성시대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으로 남기 위해 우리 마음속의 꼬마 조커를 지워야만 할 것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나쁜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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