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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간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이 참으로 착잡하다. 우리에겐 너무도 간절한 한반도 평화체제의 성공적 수립을 위해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승리하는 게 낫겠다 싶다가도, 그 승리가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더 가파르게 무너지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마음이 편치 않다. 반대로 민주당이 이긴다면 미국 민주주의의 급격한 붕괴는 어느 정도 막아내겠지만, 트럼프에 대한 강한 반감 때문에 민주당이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 과정을 방해하고 나서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세계 최초의 민주공화국 미국이 어쩌다 이렇게 민주주의 문제 때문에 세계의 우환 거리가 되었을까?

미국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은 하나같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더불어 진행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그 근본 배경으로 지목한다. 그동안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미국의 복지국가 체계를 만들었던 뉴딜 이후의 근간적 사회경제 구조를 흔들면서 그 과정에 적응하지 못한 숱한 하층 노동자 및 실업자 계층을 양산해 냈는데, 민주당은 진보를 내세우면서도 그들을 제대로 대변하고 포용하지 못하며 우왕좌왕했고, 그사이 극우 포퓰리즘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포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31일(현지시간) 중간선거에 출마한 공화당 후보들을 지지하기 위해 플로리다주 에스테로의 헤르츠 아리나에서 열린 유세집회에 참석해 경례를 하고 있다. 에스테로_AFP연합뉴스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미국만큼이나 불평등의 정도가 심각하고, 그 완화를 위한 노력도 부족하다.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정부 때의 민주주의 파괴 시도를 극복해 내었다고 우리 민주주의가 안전할 거라고 자만해서는 안된다. 지금과 같은 심각한 불평등을 방치한다면 그에 대한 반동으로 더 심각한 민주주의 위기가 올 수도 있다. 불평등은 단순히 사회적 불공정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바로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관한 문제다.

다행히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을 내세우며 광범위한 사회안전망과 복지의 체계를 갖춘 포용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민주당은 그동안 증세나 부동산 보유세 강화같이 복지 확충과 불평등 완화를 위한 결정적 조처들 앞에서 늘 머뭇거리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주의 깊고 실효성 있는 실천이다. 단기적인 지지율 관리를 넘어 긴 호흡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운명을 생각하는 정치를 기대한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미국식 민주주의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도 놓쳐서는 안된다. 마이클 샌델은 미국이라는 ‘절차주의적 공화국’이 낳은 ‘민주주의의 불만’을 이야기한다. 그는 진작부터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이 공정한 절차만 강조하며 정치 과정에서 모든 도덕적 지향을 몰아내려 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시장논리가 들어서 지배하고 결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되리라 걱정했다. 샌델이 볼 때 정치가 지향해야 할 도덕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애써 괄호 속에 넣어 두려고만 하는 미국식 자유주의 정치에선 결국 원초적인 민족주의적 언사들만이 대중들을 사로잡게 될 터였다. 백인 우월주의를 조장하고 ‘미국 우선’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대통령이 된 트럼프를 보면, 샌델은 오래전부터 그의 등장을 예견했던 셈이다.

물론 우리 민주주의는 미국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우리 민주주의에서는 오랜 성리학적 전통의 영향 탓인지 미국과는 달리 오히려 정치를 온통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고 재단하는 도덕정치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 도덕은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해야 한다. 법과 공정한 절차도 너무 자주 무시된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절차주의의 한계에 대한 샌델의 경고를 약간 초점을 달리해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조밀하게 잘 짜인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체계를 갖추었지만 트럼프 같은 권위주의자를 제대로 걸러내지도, 제어하지도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절차와 제도만으로 유지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적들로부터 지켜내려 하며 삶의 지향 자체를 기꺼이 거기에 맞추어 내려는 시민들의 태도가 사회적 습관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때에만 살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이기 이전에 하나의 가치다.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개혁만큼이나 더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한 ‘가치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도 절실하다. 우리나라는 촛불혁명을 통해 전 세계에 민주주의의 한 모범을 보였다고 자랑하지만, 예컨대 절대 다수의 시민들, 특히 청년들은 제주도에 온 예멘인들의 난민 신청을 수용하지 말라는 의견을 갖고 있다. 이런 상태를 계속 방치해 둔다면, 언젠가 한국판 트럼프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교육의 체계를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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