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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 선배와 나는 기도했다. 우리 업계 사람들만큼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도 없다. 고래만큼 거대한 배터리 위에 기어 올라가 작업을 하고 내려올 때마다 우리는 3번씩 간곡히 기도한다. 영란 선배는 이번에도 “오늘도 우리 배터리가 폭발하지 않게 해 주시고” 대목은 소리 내어 읊었다.

5년 전 나도 배터리 연구를 하겠다고 영란 선배에게 처음 이야기했을 때, 영란 선배는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되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에너지 저장 장치가 다 배터리잖아요. 친환경 에너지라면서 풍차랑 태양 에너지를 쓰는 것은 점점 늘어날 텐데. 바람 많이 불 때 햇빛 강할 때, 많이 쌓인 전기를 모아 뒀다가, 바람 안 불 때 햇빛 없을 때 쓰려면, 커다란 배터리가 집집마다 하나씩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일거리도 늘어나지 않겠어요?”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내 생각이 맞기는 맞았다. 정부 당국자들은 풍차를 좋아했다. 자기들도 뭔가 참신한 미래 느낌이 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선전하고 싶을 때, 커다랗게 팔을 벌리고 돌아 가는 풍차만큼 눈에 잘 띄는 것도 없었다. 그러니 늘어나는 풍차에 맞추어 “에너지 저장 장치”라는 이름을 단 커다란 초대형 배터리의 숫자도 같이 늘어났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다. 한번은 산불이 번져 나왔을 때 안전 회로가 망가지면서 지하실에 가득 차 있던 그 큰 배터리가 통째로 폭발한 사건이 생겼다. 그 뒤로 돌림노래를 따라 가며 부르듯이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에너지 저장 장치 폭발 사고가 났다.

다친 사람도 생기고, 집과 가게를 잃은 사람도 생기자, 세상은 책임질 사람을 찾고 싶어 했다. 높은 자리 사람에게 끈이 없던 그 동네 공무원 몇몇이 잡혀 들어 갔고, 좋은 변호사를 살 돈이 없었던 배터리 회사 직원 몇몇이 잡혀 들어 갔다. 정부는 앞으로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제부터 모든 안전 관리 책임은 배터리를 설치한 회사에 있다고 떠넘기는 법을 만들었다. 동시에 자기 이름 뽐내고 싶은 국회의원들도 각종 배터리 안전 법령들을 앞다투어 만들어 덕지덕지 갖다 붙였다.

그 결과, 배터리 안전에 관한 규정들이 13가지 법에 426개 조항으로 흩어져 나타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대단히 복잡해서, 배터리 담당 공무원들조차도 그 내용을 다 알지 못한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냥 허겁지겁 “이제 이렇게 안전 조치를 만들었습니다”하고 빨리 둘러대려고 만든 규정이라, 막상 다 지키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특수 전기 회로 관리 특별법의 배터리 점검 규정에는 배터리 성분에 물이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물을 가까이 두지 말라고 되어 있고, 에너지 화재 안전 특별법에는 불났을 때 빨리 불을 꺼야 하니 물을 가까이 둬야 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정부는 가뿐해졌다. 이제 배터리 사고가 나면 그 복잡한 규정 중에 분명히 몇 가지는 어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 핑계로 “이 악덕 기업이 안전 규정을 어겨서 사고가 났다”면서 책임을 모조리 떠넘길 수 있었다. 배터리 회사들은 난감해졌다. 사업을 접자니 수많은 직원들을 일시에 해고하는 것도 골칫거리였다.

그때 배터리 업계가 합심하여 떠올린 아이디어가 바로, 우리, 배터리 관리사들을 새로운 직업으로 키워주는 것이었다. 이제 배터리 회사들이 에너지 저장 장치를 새로 건설하고 나면, 맨 마지막에 그 배터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우리 배터리 관리사들이 “설치” 단추를 한번 누르고 내려오는 일을 한다. 단추 하나 누르는 것뿐이지만, 그러면 결국 법적으로 “최종적으로 배터리를 설치한 자”는 배터리 관리사들이 된다. 그러므로 만약 배터리 폭발 사고가 터지면, 정부도 아니고, 배터리 회사도 아닌 자영업자인 우리들이 책임을 지고 감옥에 들어가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차피 규정이 엉터리기 때문에 아무리 규정을 많이 지키고 있는지 따져 본다 한들, 그렇다고 배터리가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너무 답답해서 나는 무슨 “장관과의 대화”인가 하는 자리에서 가장 이상한 규정 세 가지를 말하면서 건의한 적이 있는데, 그랬다가 괜히 그 규정을 맡은 공무원이 “같잖은 얼치기 군소 업자가 공무원 망신 주면서 잘난 척하려고 한다”며 본보기 단속에 걸려서 구속이 되니 마니 한 몇 달 고생만 죽도록 했을 뿐이다.

“알고 보면 배터리가 진짜 중요한 건데. 스마트폰, 드론, 로봇청소기. 이런 것도 알고 보면 다 배터리 성능이 좋아졌기 때문에 나온 거 아냐. 작으면서 오래가는 배터리가 생겼으니까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거고, 배터리가 가벼워지면서 드론도 날 수 있게 된 거지. 지금 이 깨끗한 에너지, 이런 것도 결국 다 배터리가 바탕인데 말이야.”

영란 선배가 말했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별로 신경을 안 쓰고 그때그때 대충 때우려고만 할까요?”

“별 멋이 없잖아. 더 용량 큰 더 안전한 배터리. 정치인들이 폼 난다고 생각하는 구호는 아니지.”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감옥에 갈 위험의 대가로 돈을 버는 일이었다. 감옥에 안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금처럼 사고가 터지지 말기를, 신실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영란 선배, 제가 같이 일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도대체 저 왜 뽑으셨어요?”

영란 선배는 기도를 다 마치고 “설치” 단추를 눌렀다. 그리고 내 기도하는 손을 보며 대답했다.

“네가 손금이 좋더라고. 손금이. 감옥 갈 운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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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생 에너지를 실용화하고, 전력 사용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전기를 보관할 수 있는 에너지 저장 장치가 설치되어야 한다. 그런데 신재생 에너지나 전력 절약 같은 친환경 목적의 사업은 대개 그 바탕이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공공 복리를 위한 것이라서 대개 정부가 주도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 발전에 정부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 과정에서 보여주기식 정책 입안이나 엉뚱한 정치 싸움이 기술에 대한 고려보다 앞서 나가서는 안될 것이다.

곽재식 화학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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