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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까는 얇은 요를 바닥에 펼쳤다. 요는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웠다. 진만은 그 요 한가운데 차곡차곡 개킨 티셔츠와 바지 몇 벌, 양말 몇 켤레, 수건 네 장과 담요 한 장, 대학 1학년 때 엠티 가서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러곤 다시 요의 네 귀퉁이를 가운데로 모아 신발 끈처럼 단단하게 묶었다. 커다란 북극곰 엉덩이만 한 보따리 하나가 완성되었다. 이로써 이삿짐은 얼추 다 싼 셈이었다. 진만은 그 보따리를 다시 어깨에 동여매고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진만을 보면서 정용이 툭 한 마디 던졌다.

누가 널 보면…, 전쟁 난 줄 알겠다….

대학 졸업식은 2월23일이었지만, 정용과 진만은 이틀 전 서둘러 기숙사 짐을 빼기로 했다. 어차피 졸업식엔 참석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편이 더 나아 보였다. 진만과 정용은 졸업 후에도 같은 방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서로 전에 없던 뜨거운 우정이 생겼거나, 함께 공동 창업 같은 것을 모색하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월세 부담 때문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들은 대번에 채무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냥 조용히 대학만 다녔을 뿐인데도 정용이 800만원, 진만이 1200만원 빚이 생겼다. 아니, 우리가 무슨 경마장을 다닌 것도 아니고…. 진만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뇌까린 적이 있었다. 이건 4년 내내 경마장을 냅다 달리다가 은퇴한 ‘3번 마’한테 이런, 미안하지만 자네 빚이 좀 생겼네, 말하는 거나 똑같은 거잖아. ‘3번 마’에게는 건초라도 공짜로 주기나 했지, 나는 누가 등 한 번 두들겨준 적 없는데….

진만과 정용은 다행히 광역시 외곽에 있는 보증금 없는 월세 30만원짜리 방을 하나 구했다. 원래 모텔을 하다가 폐업한 건물인데, 마침 그곳 반지하방이 벼룩시장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냉큼 계약한 것이었다. 당분간 그곳에서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 얼마간 학자금 대출금을 갚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정용과 진만은 그렇게 계산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것이 급하니까. 제아무리 경마장에서 여러 차례 우승한 ‘3번 마’라 할지라도 빚이 있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야지 어쩔 것인가? 관광지에서 마차라도 끌어야지.

정용도 제 몫의 이삿짐을 들고 일어섰다. 정용은 그나마 낡고 오래된 캐리어가 있어서 한결 짐 싸기가 수월했지만 문제는 컴퓨터였다. 본체와 모니터를 들고 캐리어까지 끌자니 손이 모자랐다. 정용은 진만에게 모니터라도 부탁할까 싶어 힐끔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그는 이미 두 손에 다른 것을 들고 서 있었다.

오쿠 중탕기.

진만의 손엔 그것이 들려 있었다. 본체는 빨갛고, 냄비는 스테인리스 재질로 되어 있는, 전기밥솥보다 조금 큰 오쿠 중탕기. 진만은 그것을 이 년 전 중고나라 사이트에서 10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맥반석 달걀도 해 먹고, 우유를 넣어 요구르트도 해 먹겠다는 생각으로 구입한 오쿠 중탕기. 실제로 정용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빨갛게 타이머가 켜진 오쿠 중탕기에서 진만 몰래 맥반석 달걀을 빼 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기숙사 방이 아닌, 어디 찜질방이라도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해서 컴퓨터를 사거나 핸드폰을 바꾸는데, 진만은 오쿠 중탕기를 샀다. 컴퓨터 사용하듯 오쿠 중탕기의 전원을 켰다.

그거 갖고 가려고?

정용이 진만에게 물었다.

그럼. 갖고 가야지. 내 재산 목록 1호인데.

정용은 할 수 없이 우체국에서 커다란 박스를 구입해 그곳에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를 담았다. 두 손으로 박스를 들고 일어섰더니 저절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그래도 가야지, 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자취방까지 가기 위해선 시외버스를 타고 광역시까지 나간 후,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들은 광역시 인근 한 중학교 버스정류장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겨울의 끝자락, 마지막일지도 모를 한파가 버스정류장 간판 아래 매달려 있었다. 정용은 컴퓨터가 든 박스를 무릎 앞에 내려놓은 채 한껏 몸을 옹송그렸다. 진만은 오쿠 중탕기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두 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연신 비벼댔다. 그게 더 춥다며, 등에 동여맨 이불 보따리는 풀지 않았다.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정류장에는 그들과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 한 분만이 서 있었다.

이거 좀 먹지 않을래?

진만이 오쿠 중탕기의 뚜껑을 열면서 정용에게 말했다. 중탕기 안 게르마늄 용기에는 갈색으로 변한 달걀 8개가 수줍은 얼굴로 누워 있었다.

내가 어제 마지막으로 삶은 달걀인데, 아직 따뜻해.

진만은 슬쩍 웃으면서 달걀 하나를 정용에게 내밀었다.

정용은 처음엔 그것을 먹지 않으려고 했다. 아무리 한적한 정류장이라고는 해도, 그래도 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낡은 캐리어와 커다란 박스, 커다란 이불 보따리를 등에 멘 채 달걀을 먹는다는 게 좀….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웠다. 이제 앞으로 이거보다 더 창피할 일을 많이 당할 텐데…. 정용은 진만을 따라 달걀 껍데기를 깠다. 진만의 말처럼 달걀엔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둘이 앉아서 달걀을 여섯 개쯤 까먹었을 때, 정류장 한편에서 힐끔힐끔 그들을 바라보던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우뚝,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정용과 진만은 달걀을 한 손에 든 채 할머니의 눈치를 봤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주섬주섬 외투에서 5000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러곤 휙 진만의 무릎 위에 놓인 오쿠 중탕기 스테인리스 냄비 안으로 던져넣었다.

집에들 들어가, 어여.

할머니는 그렇게 말한 후 천천히 택시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진만과 정용은 오쿠 중탕기 냄비 속에 살포시 놓인 오천 원짜리 지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또 다른 날의 시작이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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