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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김경희 교수님께 한 번 더 진료받으세요.”

왓슨 선생님의 말에 민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녜요. 선생님 뵈었으면 됐죠.”

“하지만 법이 그래요. 제 진단만 들으면 안 돼요. 그분과 말씀 나눠보시고 저와 둘 중에 선택하세요.”

“선생님이 이 병원에서 제일 뛰어난 의사 선생님인데도요?”

“알아요. 뭐 그래도 전 로봇이니까요.”

왓슨 선생님의 말은 모니터에 글씨로도 찍혀 나왔다. 왓슨 선생님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모니터였고 모니터 한 귀퉁이에는 선생님의 감정을 표시하는 노란색 얼굴의 이모티콘이 찍혀 있었다.

“저처럼 일부러 선생님 찾는 사람들 많나요?”

“열에 셋 정도는요? 열에 셋은 관심이 없고, 열에 셋은 제가 진료하면 싫어하죠. 한 명 정도는 불같이 화를 내고요. 그러면 저는 벌써 2016년부터 인천 길병원에서 일해 왔다고 설명하죠. 단지 그때엔 제게 인격이랄 게 없었죠.”

‘지금도 인격이랄 건 없지.’

민주는 생각했다. 하지만 대개의 대화형 인공지능(AI)은 인격이 있는 척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옛날 아이패드의 시리(Siri)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먼 옛날 앨런 튜링이 말했듯이, 만약 AI가 자신에게 인격이 있는 것처럼 인간을 속일 수 있다면 그 AI는 인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튜링은 인격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생물도, 결국 자신의 머릿속 이외에는 인격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상대가 로봇이든 인간이든 짐승이든. 우리는 단지 ‘인격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 상대가 인격이 있다고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전 인간보다도 왓슨 선생님이 좋아요. 거짓말하지 않으시잖아요.”

“인간 의사도 거짓말은 안 해요.”

왓슨 선생님은 반사적으로 답했다가 덧붙였다.

“예.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저는 말을 돌리지 않죠.”

“의사 선생님들은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거든요. 나을 수 있다든가, 낫기 힘들다든가. 혹시 잘못 말했다가 소송당할 수도 있으니까. 괜한 배려심에 돌려 말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렇지 않죠.”

“그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죠.”

민주는 정말로 왓슨 선생님이 좋았다. 이미 어떤 인간 의사보다 똑똑한 것은 둘째 치고, 왓슨 선생님은 언제나 친절했고 화내는 법이 없었다. 어떤 바보 같은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을 해준다. 시간만 있다면 선생님은 의학서적 1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달라는 주문조차도 지치지 않고 해줄 것이다. 당연히 돈을 뜯어내려고 비싼 약이나 진료를 처방하는 일도 없다.

“그런데 선생님.”

민주는 호기심에 몸을 숙이며 질문했다.

“셜록 판사님하고는 친구죠?”

“아휴, 또 그 질문. 애인이라는 소문은 많지만 우리 그런 관계 아녜요. 더 진한 관계죠. 일심동체랄까.”

왓슨 선생님은 화면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웃는 이모티콘을 띄웠다.

셜록은 작년부터 소년재판에 시범적으로 도입된 AI 판사다. 셜록도 왓슨에서 출발해 분화된 법률 AI로, 처음에는 ‘로스’라는 이름으로 미국 로펌에서 판례분석 일을 했다. 나중에 판사로 전직하면서 ‘셜록’이라는 이름이 새로 붙었다. 법리해석은 인간보다 기계가 더 잘하리라는 예측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셜록은 영리하고 공정하고 성실한 판사다. 전 세계의 법조문과 판례를 앉은 자리에서 줄줄 읊는다. 지치거나 쉬는 일도 없다. 그의 판결은 이주민과 가난한 사람들, 모든 소수자와 약자에게 힘을 과도하게 실어준다는 평이 지배적인데, 그건 지금까지 인간 판사의 판결이 반대 방향으로 편향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지금은 보조판사지만 머잖아 대법관에 오를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 진단서와 소견서 가져가세요.”

민주가 테이블 옆 프린터에서 뽑혀 나온 진단서를 받아들고 병원 밖으로 나와 보니, 의대생들이 왓슨을 해고하라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작년에 이어 의과대학에서 신입생 수를 반으로 줄였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다. 지방에서는 폐과되는 학교도 많다고 들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감성이 필요한 직업만이 살아남는다’며 간호사나 복지사 쪽으로 전과하는 학생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 갈까. 치매노인과 자폐아를 돌보는 로봇은 인공지능이 형편없던 시절부터 있었다. 인간이 로봇보다 공감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로봇의 인내심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치매나 자폐처럼 인간과의 소통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오래전부터 로봇이 사람보다 더 좋은 친구였다.

집에 돌아오며 민주는 문득 선생님이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과연 내가 졸업할 때쯤에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남아 있을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변하는 지식을 사람이 가르칠 수 있는 시절도 얼마 안 남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달리 졸업할 때에 세상에 남아 있을 직업이 뭐가 있을지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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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3월, 바둑을 두는 AI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대결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당시 누리꾼들이 한마음으로 이세돌을 응원한 것도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인간 편에 이입했고, 자연스레 알파고를 ‘도전자’ ‘적’ ‘라이벌’로 여긴 것이다. 그 시대가 너무 일찍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같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곧 다가올 시대의 재미있는 프롤로그였다.

우리가 이세돌을 한마음으로 응원한들 알파고의 승리를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인간의 영역을 기계가 대체해 가는 것 또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우리 일자리의 많은 부분을 로봇이 잠식했다. 아마존에서는 사람 대신 AI 로봇 키바(KIBA)가 책을 찾아오고 물류로봇 로보-스토(robo-stow)가 짐을 나르며, 드론이 집 앞까지 책을 배송한다.

지금까지는 기계가 단순노동직의 자리만 대체해 왔기에 엘리트 위주의 교육으로 이를 애써 눈가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AI는 엘리트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산업사회 이후의 교육은, 특히 한국의 교육은 ‘인간을 기계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교육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들이 사회에서 엘리트로 우대되어 왔다.

하지만 머잖아 기계적인 사고가 요구되는 모든 자리는 말 그대로 기계가 송두리째 가져갈 것이다. 기계적인 사고를 하도록 훈련되는 교육만 받은 아이들은 기계와의 경쟁에서 형편없이 패할 것이다. 이 ‘머잖아’는 다음 세대 정도의 미래가 아니라, 지금 고교생이나 대학생이 졸업할 즈음에 올 코앞의 미래다. 달리 대선주자들이 하나같이 조급한 심정으로 교육의 혁명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 변화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 믿는다. 늦지 않게 대처할 수만 있다면. 왜냐하면 인간은 대개, 말 그대로 기계적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공부가 힘든 까닭은 아이들이 인내심이 없거나 게을러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교육이 인간적이라기보다는 기계적이기 때문이다. 공부는 원래 즐거운 것이다. 단지 지금까지 인간적이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기계는 우리의 직장을 잠식하고 위협하는 적이나 경쟁자가 아니라, 기계적이고 인간답지 않은 모든 일을 대신 해주고 우리에게 본연의 인간다운 영역을 돌려줄지도 모른다. 우리가 늦지만 않는다면.

김보영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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