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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씨는 무거운 방사선 차폐복 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산소통에는 신선한 공기가 들어있고 차폐복 내 에어컨도 정상 작동되고 있으니 땀을 흘릴 이유는 없지만-아니, 물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는 이유가 없다 해도 정신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도대체, 내가, 왜?

왜긴 왜야, 망할 관료주의의 어처구니없는 노파심 때문이지. 로봇들에 맡겼으면 그냥 믿고 다 맡길 것이지 뭐하러 일 년에 한 번씩은 직접 들어가서 봐야 된다고…. 노파심이 아니라 편집증이야, 편집증. S씨의 상념에 아랑곳하지 않고 방사선 차폐 자동차 밖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기술자들이 하나둘 물러선다. 제어판 램프들이 모두 초록색으로 바뀐다. 아, 젠장, 이 낯선 아날로그 계기들, 익숙하지 않은 내연기관의 진동, 수동식 기어. 모든 것이 S씨가 앞으로 가는 곳이 얼마나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곳인지 알려주는 상징 같아 더욱 불안해진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점검 끝났습니다. 출발하세요.”

매정한 안내 방송에 S씨가 결국 가속 발판을 밟자 육중한 차체가 천천히 움직인다.

내비게이터는 목적지 5㎞ 밖에서 지직거리다 꺼지지만, 아쉽게도 찾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두꺼운 납유리 차창 밖으로도 지상에서 200m 가까이 치솟아 있는 콘크리트 돔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3중 차폐문을 지나 들어간 돔 안은 거인들의 세계다. 차 옆에서 천천히 걷는 신장 3m의 안내 로봇은 다른 작업 로봇들에 비하면 난쟁이에 불과하다. 주변에선 5m, 10m 크기의 로봇들이 땅을 파헤치고 발전소 건물을 뜯고 기계들을 분해하고 있다. S씨는 계속 차내 가이거 계수기를 쳐다보느라 창밖 풍경은 보는 듯 마는 듯하며 차를 몬다. 중간에 두 번 정도는 지시받은 대로 시찰 코스를 즉흥적으로 변경해서 안내 로봇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지만, 거기서도 작업 로봇들은 예상했던 작업만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고, 별다른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망할 노파심일 뿐이었다는 거지. 아니, 참, 노파심이 아니라 편집증. S씨는 생각하고, 분노한다. 돔에서 나오기 직전까지는.

돔에서 나올 때쯤, 그동안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던 로봇에 작별 인사를 하며 S씨는 무심코, 인사치레로, 뭐 불편한 점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묻는다. 안내 로봇은 작업 소음을 압도하는 천둥처럼 쾌활한 목소리로,

“전혀 없습니다. 저희는 애초에 이 돔 안 환경에 맞춰서 설계, 조립된 거잖아요. 돔 내부의 이 온도, 이 기압, 이 방사능 수준은 저희들에게는 정말 상쾌하고 기분 좋은 환경이랍니다. 이런 화창한 날씨에 일하는 건 일도 아니지요.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똑같은 기계음이었건만 S씨는 어조가 침울하게 들렸다고 기억했다) 이렇게 즐겁게 일하고 있기 때문에 작업이 예정보다도 일찍 끝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은 앞으로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이와 같은 일을 계속하기를 원합니다! 말씀해주십시오. 돔 바깥은 여기와 다른가요? 바깥세상에는 저희들이 좋아할 다른 돔이나 일이 없는 게 확실한가요? 저희들 중에는 단순히 바깥세상이 궁금한 로봇들도 있고, 바깥세상에 나가보기를 원하는 로봇들도 있습니다. 어떤 로봇들은 여기에서의 일이 모두 끝나면 돔이 활짝 열리고 저희들 모두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 로봇들은 바깥세상은 여기보다 훨씬 더 뜨겁고 압력이 높으며, 방사능에 오염된 기계와 철근, 콘크리트가 훨씬 더 많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혹시 정말로 그런지요?”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밖에 나가면 뭐라고 보고서를 써야 할지 아득할 뿐이다. 열 개가 넘는 원자력발전소가 밀집되어 있던 이곳이 예상치 못했던 대규모 지진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버린 뒤 뒷수습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로봇뿐이었다. 하지만 이 로봇들이 너무 지나치게 일을 잘하고 있는 거라면? S씨는 돔 안에서 봤던 풍경들이 모두 새롭게 인식되었다. 로봇들이 발전소 내벽과 오염된 설비들을 과연 해체만 하고 있었나? 뜯어서 먹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우리가 과연 3m, 5m, 10m짜리 로봇들을 만들었었나? 몇 대나 만들었었지? 혹시 이 로봇들은 번식하고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골목 주변에서 뛰어다니던 그림자들, 어디선가 아이들의 노랫소리, 자장가 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고온 고압 환경 속에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들을 다룰 수 있는 이들이 바깥으로 나오고자 한다면 과연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S씨는 무거운 방사선 차폐복 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출구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과연 저 문이 출구가 맞을지, 저 바깥에 희망이 있을지, S씨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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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환경 작업 로봇이 작업할 극한 환경은 대개 우주와 심해, 지하 등이 꼽히고, 지진, 화재 등 재난 지역이나 지뢰 매설 지역, 방사능 오염 지역 등도 이야기됩니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온도와 압력, 공기와 방사능 조건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로봇을 생각해보면 인체란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가, 하는 생각도 새삼 듭니다(한국의 노동 환경은 이미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것 같지만요).

작업 지역이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구역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리고 작업 환경과 조건, 내용이 복잡해질수록 상황 파악과 판단, 명령과 실행 사이의 시차 때문에 작업 로봇을 사전에 프로그래밍하거나 원격으로 조종하는 방식은 효율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로봇을 믿고 내보낼 수 있을까요? 1942년에 나온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술래잡기 로봇(Runaround)>은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과 관련된 극한 환경 작업 로봇의 딜레마를 재미있게 다룬 고전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인공지능에 대한 문제로 돌아갑니다. 지난 2주간 이 코너에서 이미 다뤘으니 더 나아가지는 않겠습니다만, 저는 우리가 과연 우리를, 그리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신뢰하며 살고 있는지, 어떻게 하면 신뢰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곤 합니다.

박성환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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