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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미래의 눈]셋, 하나, 우리

opinionX 2018. 10. 18. 11:05

“‘상계(相係)’ 신고는 혼인신고와 다릅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요. 담당변호사가 보낸 서류는 완벽하지만 그것만으론 통과할 수가 없어요.”

선화는 다소 기계적으로 대답하는 상계신고 담당 공무원의 얼굴이 아니라 화면 우측 위를 주시했다. 지금 화면에 등장해서 신고과정을 진행하는 사람이 진짜 공무원이라는 신분 인증 아이콘이 천천히 깜빡거리고 있었다.

선화와 함께 민원채팅을 하고 있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하자고 약속한 주희가 불만을 드러냈다.

“누구와 함께 살고 헤어질지 허가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답답해서 그래요.”

선화는 뻔한 대답이 나올 거라 예상하고 뇌파동조기의 신호에 맞춰 주희에게 생각을 보냈다.

‘그런 말까지 할 필요 없어. 규정이라 어쩔 수 없다면서 변명을 늘어놓을 거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시간이라도 단축되겠지.’

머릿속으로 주희와 채현의 투덜거림이 전달되었다. 선화는 웃음을 참고 담당공무원의 변명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말은 예상과 조금 달랐다.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상계관계는 결혼보다 더 강력한 결합입니다. 살면서 여러 가지 계약을 하시죠? 기존 부부는 계약 시 각자 동등한 주체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계관계는 뇌파동조로 생각을 공유하잖습니까. 그래서 법적으로 단일 주체가 됩니다. 법률적 문제만이 아니라, 상계관계의 의미가 그렇잖습니까? 따라서 다수신청자가 기술적으로 상계주체가 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선화는 딱히 허점을 찾을 수 없는 의외의 답변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는 첫 상담에서 선화와 주희와 채현에게 상계관계의 법적 의미를 설명하려고 여섯 시간을 고생했다. 적어도 사전 교육은 제대로 받은 공무원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반나절은 비우고 오시라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지금부터 신고자 세 분께 다소 복잡한 상황을 제시하겠습니다. 특히 여러분은 사적인 사고영역까지 모두 공유하는 상계3단계를 신청하셨기 때문에, 계약뿐만 아니라 인생의 전 영역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질문은 가상현실 속 체험 형태로 진행됩니다. 끝나고 나면 상계자로 함께 3년 정도를 산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만 그 기억은 소거됩니다. 구체적인 체험 내용은 저를 포함해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정부에서 기록하는 건 동조율뿐이니까요. 준비되셨나요?”

선화와 주희와 채현은 뇌파동조기를 통해 마음을 모으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제 세 사람은 현실 시뮬레이션 속에서 온갖 갈등 상황을 겪을 것이다. 사고동조 능력이 충분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그렇게 바라던 상계자가 되어 한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은 머릿속으로 서로를 다독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최근 신경과학자들이 일명 ‘브레인넷(BrainNet)’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브레인넷이란 둘 이상의 두뇌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의 이름이다. 뇌파전위기록(EEG)과 경두개자기자극(TMS) 기술을 결합한 인터페이스로, 간단히 말하면 뇌에서 오가는 신호를 기록하고 전달한다. ‘전달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보낼 뿐 아니라 받아서 그 의미를 인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뇌 신호 전달이라면 피험자가 둘인 실험을 떠올리기 쉬우나 이번 실험은 세 사람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송신자 두 사람은 테트리스 게임 화면을 보고 블록을 좌우 어느 쪽으로 돌릴지 판단한 다음 주파수가 서로 다른 두 불빛 중 하나를 쳐다본다. 수신자는 송신자가 어느 불빛을 쳐다보았는지 정보를 수신하고, 회전 방향을 마지막으로 결정한다. 여기서 피험자가 셋이라는 사실이 의미를 갖는다. 뇌파 기록과 전달을 통해 다수결에 따른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 것이다.

물론 아직은 양자택일 상태만 전달하는 실험일 뿐이다.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1비트라는 뜻이다. 하지만 뇌의 각 영역이 담당하는 기능과 그 신호를 모조리 파악하기 위해 뇌지도 작성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니, 복잡한 생각이나 여러 개의 감각으로 받아들인 상황까지 유·무선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릴지도 모른다.

그 기술이 실현될 때쯤 우리는 ‘관계’에 대해 재정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 한계 때문에 보호할 수 있었던 내면을 공개해도 좋을 만큼 누군가를 믿고 사랑할 수 있을까? 과학 덕분에 진정한 이해와 이상적인 합의가 실현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아직 철저하게 각자의 인생관에 따를 수밖에 없지만, 머지않아 우리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얻을지도 모른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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