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미효는 잊지 않아야 할 것과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자유롭게 살려면 많이 덜어내고 많이 흘려보내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미효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과 머릿속에서 형성되는 생각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파란 머리띠를 항상 머리에 쓰고 있다. 머리띠와 미효의 애증관계는 어느 날 의사가 알려준 사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의사가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미효는 머리띠 오른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조정했다. 소음과 흐릿한 영상이 스쳐 지나가고 1년 전 만났던 의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검사 결과 환자분께서는 인지장애증입니다. 인지장애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 중 초기 알츠하이머로 보입니다.”

미효는 머리띠를 조작해 다음 기억으로 건너뛰려다가, 진단명을 처음 듣고 받았던 충격을 또 한 번 깊이 되새기려고 눈을 감은 채 기억의 흐름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미효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몸을 살짝 떨었지만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기억 속 의사가 말을 이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치매라는 용어가 쓰이던 시절처럼 무서운 병은 아닙니다. 이제는 노화 현상의 일부라는 게 밝혀졌고요. 뇌조직이 더 많이 손상되지 않게 막고 재생하는 치료를 바로 시작하면 됩니다. 문제는 꽤 긴 치료 기간에 유실되는 기억이죠.”

미효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머리띠를 샀다. 색은 파랑으로 골랐다. 아직 알츠하이머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반투명이나 검정색을 선택한다지만 미효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파란 머리띠는, 그것만으로는 약간 비싸고 그리 예쁘지 않은 머리띠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선으로 연결되는 저장장치와 함께라면 미효의 두려움을 크게 덜어줄 수 있었다. 머리띠는 뇌 전달물질이 전파하는 신호와 시냅스를 오가는 정보를 모두 스캔해서 저장장치에 담아준다. 미효는 세상 무엇보다 그 저장장치가 소중했다. 만약 병이 급히 진행되어 기억의 유실 속도가 보관 속도보다 빨라진다면, 정신 활동이 남는 곳은 저장장치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미효는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 눈을 뜨는 순간 머리띠부터 찾는다.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절반 정도 되는 저장장치 두 개를 양쪽 주머니에 넣는다(‘백업은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은 컴퓨터뿐 아니라 사람의 기억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저장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녹색 불빛이야말로 그가 자아상실의 공포로 일상생활을 포기하지 않도록 안심시켜주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미효는 머리띠의 전송 모드를 ‘자동’에 놓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머리띠는 조금씩 약해지는 두뇌의 연상 및 기억 활동을 보조해 주었다. 치약의 민트 냄새는 나흘 전에 마셨던 차를 연상시켰고, 차의 향과 맛에 대한 기억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연인과 연결되었다. 미효는 연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얼굴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손상된 현재 뇌 상태 그대로라면 하루 종일 괴로워하다가 자신이 돌이키려 애쓰는 것이 뭔지도 잊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자동’모드에 있는 머리띠와 저장장치 속 회로는 미효의 연상 패턴을 학습했다가 단절된 부분을 즉시 연결시켰다. 미효의 기억은 연인의 눈 코 입과 목소리, 민규라는 이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각적으로 이어졌다.

미효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지 않은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게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밴드를 조작해서 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오늘 만나. 언제쯤이 좋아?”

“어디 보자. 네 시 반에 회사 앞으로 올 수 있어?”

민규. 회사. 회사는 명동에. 명동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시각은 네 시 반. 그 정보들 역시 두 개의 저장장치로 전송되고, 저장되고, 머리띠로 피드백되어 다시 뇌에 도달했다.

“응. 그럼 이따 봐.”

미효는 그처럼 의학과 기술의 도움으로 잊지 않아야 할 것과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을 지켜가면서 두뇌를 재건하고 있었다.

····················································································································································································

두뇌는 문명의 출발점이자 우리의 자아가 머무르는 장소다. 사람의 정신활동이 완전히 정의되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 문제는 한동안 풀리지 않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정신활동이 두뇌에서 일어나는 것만은 틀림없다. 심리학이 전담하던 문제들을 뇌과학이 상당수 물려받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을 직접적으로 연구하고 조작하는 활동이 완전한 금기의 영역이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합리적이지 않은 성역이 차츰 무너지는 시점에서 뇌 또한 예외일 이유가 없다. 생물학적이거나 의학적인 필요성이 있음은 물론이고 ‘지능’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얻기 위해서도 적극적인 뇌 연구는 필요하다.

요즘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을 논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숫자만 바꾼 옛 광고용어처럼 느껴지는 단어다. ‘산업’이 다른 변화를 선도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자본과 산업이 기술을 필요로 하고, 그 기술이 일반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바꾸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생명과 지능의 본질에 도달하는 기술이라면 그 테두리 바깥에 도달해야 하지 않을까?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면 정신과 사고와 디지털 정보를, 또는 지금과 형태가 다른 새 정보 양식을 하나로 처리할 수 있다는 예견이 있다. 그때도 우리는 ‘산업’을 우선시해야 할까? 4차가 5차로 바뀔 때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산업혁명 대신 존재혁명을 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김창규 SF작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