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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 발표 5일 휴일 관철. - 무소속 후보 김효구’

동네 친구 사이인 성우와 재현은 근린공원으로 걸어가며 머리 위에 걸린 현수막을 바라보았다. 1년 동안 쓰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있었다.

거의 억지로 끌려나온 재현이 시선을 성우에게 돌리고 말했다.

“네 말이 하나는 맞네. 돈이 없는 후보야. 인쇄물도 조악하고, 자원봉사자 수도 적고.”

성우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사실 그게 전부야. 무슨 소리냐고 쳐다보지 말고, 그냥 가서 들어봐. 적어도 저 후보가 나보다 잘 설명할 테니까. 끝나고 나면 내가 한잔 쏠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사람은 근린공원 중앙에 자리 잡은 공터로 들어섰다. 사탕발림하는 공약이 지루하게 반복될 거라는 재현의 예상과 달리 그와 성우가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스피커를 통해 김효구 후보가 말했다.

“제 공약은 이게 전부입니다. 이제 법적 유세 기간 중 최소 5일을 국가 휴일로 바꾸자는 주장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김효구가 설명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많지 않은 노인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젊은 애들이 투표 핑계 대고 놀러가는 걸 도와주려고? 그러면 표를 더 받을 것 같아? 노인은 여기저기서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슬그머니 말꼬리를 내렸다.

김효구 후보는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 5일 동안 후보가 인터넷 방송에 집중하기보다 직접 유권자를 찾아다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와 동시에, 유권자 여러분께서도 직접 발표장을 찾아가서 선택할 사람을 고르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부지런히 유세를 보러 가냐고 물으실 겁니다. 사라지는 풍경이죠. 여기 오신 분들은 다릅니다만. 인터넷 라이브 방송이나 각종 지역 유선 채널로 보시는 분은 점점 늘어나서, 통계에 따르면 유권자 89퍼센트가 후보를 직접 본 적 없이 투표를 한다고 합니다.”

재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잊고 있었다는 듯 귀에 꽂힌 완전무선 이어폰을 누르고 스마트폰의 라이브 방송 채널을 맞췄다. 그리고 이미 지나가버린 김효구 후보의 공약 부분을 되감기로 들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로 인터넷과 유선 채널로 본 유세가 사실 그대로일 거라 믿으십니까? 이제 해커들은 사람의 얼굴을 금세 컴퓨터그래픽으로 흉내 내고, 방송을 실시간으로 가로채서 바꿀 수 있습니다. 돈으로 고용된 해커들은 유세 내용과 상관 없이 주문자 상대편의 유세를 왜곡하고 방해합니다. 말하자면 신종 금권선거인 셈입니다.”

재현이 놓쳤던 공약 부분을 다 듣고 해커 이야기에 다다를 즈음 스마트폰 화면이 두어 번 깜빡거리더니 김효구 후보가 하지도 않았던 말이 흘러나왔다. 김 후보가 5일이나 놀면 좋지 않겠냐고 농담을 하는 가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보안업체를 고용하면 되지 않느냐고요? 저 같은 후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돈이 많이 필요합니다. 사이버경찰이 다 잡으면 되지 않느냐고요? 경찰력이 부족하기도 하고, 일단 당락이 결정되고 나면 설사 해커가 잡혀도 길고 지루하고 불확실한 재판이 이어집니다.”

재현은 스마트폰 화면을 끄고 조금 더 진지해진 얼굴로, 귀를 통해 후보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대책은 계속 강구되겠지요. 하지만 그때까지 여러분들의 주권 행사가 돈 때문에 방해받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장은 옛날처럼 걸어서 후보를 찾아가 듣는 게 최선입니다. 그러니 주변 분들에게 5일을 휴일로 정하자는 이유를 설명하고,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투표에 관한 한, 직접 유세를 듣는 게 미래에 맞는 모습일 수 있습니다.”

미국 연방수사국은 11월 중간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각 당내 경선에 해커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수사하는 중이다.

캘리포니아주 45선거구에서 연방 하원의원에 도전하려던 민주당 예비후보 데이비드 민과 48선거구의 예비후보였던 한스 커스태드가 피해자였다. 사이버 공격을 당한 두 후보는 모두 패배했다.

이 두 사건에서 해킹과 중간선거 결과가 완전한 인과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러 전문가들은 두 후보의 선거사무소가 사이버 공격을 방어하거나 보안 전문가를 고용할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는 점을 더 심각하게 보고 있다.

규모가 작은 선거일수록 자금 동원 능력이 크게 부족한 후보가 사이버 공격에 노출될 위험이 있어 문제가 크다. 금권선거가 기술을 악용하는 자들의 힘을 빌려 다시 한 번 활개 칠지도 모르는 것이다.

유권자가 제 뜻을 올바로 반영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이고 현대 정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 과정이 투명하게 진행되려면, 팔짱 끼고 앉아서 내 눈과 귀에 전달되는 정보만 믿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과거와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지 모른다.

통신 기술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해결해주지만, 만약 그 편리함 속에 눈을 가리고 그릇된 길로 우리를 납치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린다면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불편함쯤은 적극적으로 감수해야 할 것이다.

분야와 사안에 따라서는, 미래가 무조건 편리할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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