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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천을 거슬러 한계령으로 오르는 길 첫머리의 마을은 이맘때 김장을 한다. 이 마을 밭에 심어놓은 배추는 가을부터 서리를 맞으면서 꿋꿋하게 속을 채운다. 자드락밭의 배추도, 더기밭의 배추도, 노농의 배추도, 신출내기의 배추도 사이좋게 같은 때에 노란 속이 차오른다. 날마다 배춧속이 여물어가는 걸 지켜봤던 이들은 행여 때를 놓쳐 배추가 얼까 봐 11월에 들어서면 김장을 서두른다.

이 마을에서는 김장하는 날의 차례를 마치 순번 뽑기를 하듯이 정한다. 올해는 공무원으로 있다가 은퇴한 뒤 이곳에 정착한 집이 맨 먼저 시작했고, 이틀 뒤에는 가락시장에서 청과물 장사를 했다는 집이, 이틀 뒤에는 몇 년 전에 이장을 그만뒀지만 여전히 ‘조 이장’이라고 불리는 집이, 그 집 김장이 끝나는 다음날에는 민박하는 집이…. 이런 식으로 차례가 정해지면 마을 사람들은 집을 돌면서 김장 품앗이를 한다. 배추를 갈라 소금에 절일 때도, 어스름한 새벽 얼음물처럼 차가운 산골물에 절인 배추를 씻을 때도 빨간 고무장갑을 낀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일손을 돕는다. 반평생 제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10여년 동안 한마을에서 어우렁더우렁 살아온 터라 일을 할 때면 손발이 척척 맞는다. 어떤 이는 손끝이 맵고, 어떤 이는 간을 잘 맞추고, 어떤 이는 허드렛일을 잘하며, 어떤 이는 노래를 잘 부른다. 때로 사소한 의견 차이로 입을 비죽대지만, 금방 우스개 얘기로 깔깔거린다. 그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대면 대개 옆에서 술판을 벌인 남편들을 흉보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들이 여름내 배추를 키우느라 품을 들인 것을 상기하고는 노란 배춧속을 뜯어 안주로 내어준다.

마음은 청춘인데 몸은 따르지 않아 일어설 적마다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고, 두어 집 김장을 돌고 나면 밤새 끙끙대면서도 그들은 마을 김장을 다 마칠 때까지 앓아눕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이 담근 김장김치는 도시로 보내져 자식들이 겨우내 먹을 양식이 된다. 한계령 어귀 마을의 김장은 마을의 노인회관 김장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들의 김장을 받아먹는 나는, 부디 그들 모두 강건하여 오래오래 김장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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