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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했다. 자주 쓰는 속담이지만, 정확한 뜻이 아리송했다. 이럴 때 주로 <우리말 절대지식>이라는 책을 참고한다. 책에서 찾아보니 ‘목구멍이 포도청’을 “막다른 지경이 되면 행동하는 데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됨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밥벌이의 사정과 비애가 모두 들어 있는 관용구이다. 그렇다. 건물주의 자녀로 태어난 복에 겨운 예외적 처지에 놓인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 모두의 목구멍은 포도청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일의 대가는 긴요하다. 일이 있는 곳엔 반드시 대가 또한 있어야 한다. 이 규칙이 지켜져야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도 세상을 살 최소한의 희망이 있으니까. 일을 했는데도 정당한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경우 ‘임금체불’을 신고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노동자의 딱한 형편을 법과 제도가 헤아리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일의 대가로 정당한 임금이 지불되지 않았음에도 ‘임금체불’임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반 일리치는 지불되지 않는 이러한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 불렀다. ‘그림자 노동’을 하는 사람을 찾아나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형마트에 갔다. 무인계산대가 있다. 마트는 무인계산대의 편리함을 강조하며 무인계산을 유도한다. 적지 않은 사람이 무인계산대에서 결제한다. 무인계산대가 아니었으면 마트가 고용한 사람이 했을 일이다. 그러나 손님으로 마트에 왔으나 무인계산 노동을 한 사람에게 마트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영화 티켓을 예매한다. 익숙한 사람이라면 예매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영화 티켓을 구매하려고 그 사람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사용했고, 예매에 필요한 데이터 비용도 그 사람이 부담했다. 영화표를 판매한 영화관 측은 그에게 역시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림자 노동’은 현대인의 발걸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림자 노동’은 일자리 파괴자이기도 하다. 샐러드바를 운영하는 식당에서 손님은 음식을 접시에 담는 동안 임시 종업원이었다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할 때는 손님이지만 식사가 끝나고 접시를 다시 퇴식대로 옮기면 다시 임시 종업원이다. 스타벅스에서 사이렌 오더로 주문하는 ‘그림자 노동’이 쌓이고 쌓이면 누군가 스타벅스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든다. 햄버거 집에서 터치스크린으로 주문하고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동안 우리는 잠시 주문받는 종업원으로 ‘그림자 노동’을 한다. 맥도널드에서의 일시적 ‘그림자 노동’은 누군가 차지하고 있던 계산원이라는 일자리를 파괴한다. 대형서점에 비치된 컴퓨터로 도서를 검색하는 ‘그림자 노동’을 하는 동안, 예전의 대형서점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독서전문상담가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우리는 웹체크인을 하고 ATM으로 돈을 인출하고 스마트폰으로 이체하면서 고용된 사람이 했던 지불 노동을 스스로 해치운다.

‘그림자 노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 대형서점에 들락거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대형서점은 팝업스토어 매대를 비싸게 판매할 수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우리가 서로 질문하고 대답을 주고받는 동안 그 북적임을 포털 사이트는 이윤으로 전환시킨다. 인턴십이 취업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반적 추세로 자리 잡으면 기업은 봉급이나 수당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건강하고 활력에 넘치는 젊은 ‘그림자 노동자’를 통해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다.

‘신박한’ ‘인싸템’을 발견하여 인스타그램에 인증사진을 찍어 올려봐야 우리는 기껏 몇명의 팔로어를 더 얻지만 그사이에 인스타그램의 기업가치는 무럭무럭 자란다.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10억달러에 인수했는데, 2018년 인스타그램의 기업가치는 1000억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라고 한다. 인스타그램의 피드에 매일 부지런히 임금도 받지 않은 채 사진을 올리는 우리 모두의 ‘그림자 노동’이 발휘한 마법이다. 덕택에 1984년생인 페이스북의 창업자 저커버그는 추정 재산이 730억달러에 달하는 부자가 되었다.

‘그림자 노동자’는 유령같다. 실체를 포착하려 들면 어디론가 사라진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림자 노동자’를 찾기 힘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림자 노동자’가 어디에나 있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그림자 노동자’는 매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하고 터치스크린으로 주문하고 애플리케이션으로 예약하고 정보를 검색하고 공유하는 나이고, 당신이고 결국 우리 모두이다.

우리 모두가 사실상 ‘그림자 노동자’라면 발견해야 할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그림자 노동자’가 아니라 ‘그림자 노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림자 노동’으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은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

그들에게 체불된 ‘그림자 노동’ 임금을 청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우리 모두 “목구멍이 포도청”이지 않은가. ‘그림자 노동’을 매일 열심히 한 우리의 몫은 어디에 있는가?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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