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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26일 오전 8시45분, 미국 뉴저지주 호보컨시 역으로 기차가 진입하고 있었다. 역내 승강장은 출근길 시민들로 북적였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승강장에 들어선 기차는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충돌방지대를 넘어 대합실 벽과 충돌한 후에야 멈췄다. 목격자들은 “기차가 전혀 감속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 사고로 한 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 연방교통안전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호보컨역의 충돌방지대는 1907년 역사(驛舍)를 처음 지을 당시 설치된 것으로 철근 콘크리트 재질로 되어 있었다. 이는 시속 20㎞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열차를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충돌방지대가 설치되었더라면 기차가 대합실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사고는 미국의 노후 인프라(infrastructure)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미국 전역에 깔려 있는 도로, 항만, 철도, 통신 등 인프라는 가까이는 수십년 전, 멀게는 100여년 전에 건설되었다. 아무리 유지·보수에 신경을 쓰더라도 세월의 힘을 이길 장사는 없다. 문제는 노후 인프라를 개선하려면 천문학적인 예산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작동하는 인프라를 어떤 정치인이 나서서 일신(一新)하려 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프라를 지루한 것으로 여긴다. 결국 총체적인 개혁보다는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의 땜질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노후 인프라 문제보다는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화려한 첨단 기술에 대한 투자를 강조한다. 현재 미국이 맞닥뜨리고 있는 인프라의 위기는 이러한 선택들이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결과다.
인프라는 지루하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인프라의 특성상 일단 자리를 잡으면 오랜 기간 동안 큰 변화 없이 그 자리를 지키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빠른 기술 혁신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인 인프라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는 것은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이다. 2016년 호보컨역 기차 사고가 바로 그러한 사례이다.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하자 전국 교량의 안전성에 대한 관심이 순간적으로 증대했다. 2014년 서울 송파구에서 싱크홀 현상이 발생하자 각지의 도로 상태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양면적 성격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인프라의 특성과 문제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그럼에도 이를 더욱 잘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십년 전 설치된 인프라의 노후화 문제는 한국에서도 대두되기 시작했고 점차 더 심각해질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인프라 문제는 미국에서와 같이 정치적 무관심의 대상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대 대통령은 인프라를 일신하는 작업을 핵심 국정 과제로 삼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보화’라는 구호 아래 인터넷 통신망을 구축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한반도 대운하’라는 야심찬 기획을 내놓았고, 임기 내내 전국의 주요 하천을 정비하는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창조경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권역별로 19개의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설치하는 제도적 인프라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듯 한국의 최고 정치 지도자들은 인프라 구축 사업을 자신의 핵심 브랜드로 삼아 왔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국토 규모가 비교적 작고 인프라 사업을 중앙정부가 주도할 수 있다는 한국적인 특성이 깔려 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임기 초의 정치적 자본을 가지고 추진해볼 만한 사업인 것이다. 나아가 일단 구축되면 그 자리를 지키는 인프라의 특성은 임기가 끝난 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며 해당 정권의 정치적 유산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경향성 때문에 역대 대통령은 임기 중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 방향을 인프라 구축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하려 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인프라에 내포된 가정들은 기존의 질서와 이해관계를 재편성하고 이를 영속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의 브로드밴드 인터넷 인프라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에 중소 규모 정보기술(IT) 벤처기업들이 진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구상이 깔려 있었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은 토목·건설 사업자들의 일거리를 보장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인프라의 형태로 물화(物化)된 정책은 임기 후에도 그 자리에 남아 쉽게 제거할 수 없게 된다.
인프라 구축 사업은 미래를 설계하는 작업이다. 한국의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인프라 사업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구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제 임기의 첫 1년을 보낸 현 정부는 취임 당시부터 ‘4차 산업혁명’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된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작년 10월부터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종합적인 국가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인프라 구축이라는 관점으로 위원회 회의 자료를 살펴보면 ‘초연결 지능형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항목이 눈에 들어온다. 사물인터넷(IoT) 전용망을 구축하고, 10기가 인터넷망을 상용화하며, 2019년까지 세계 최초로 5세대(G) 통신망을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5G라는 구체적인 인프라 사업이 내포하고 있는 가정들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문재인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한국의 미래를 알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최형섭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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