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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스러운 날이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일구어낸 장면마다 가슴 벅찼다. 한반도 평화를 약속하며 두 손 꼭 잡고 서 있는 남북한 정상의 모습에 감동받지 않는 시민이 있으랴. ‘멀다고 말하면 안되겠구나’라는 김정은 위원장의 말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아니 분단에서 통일까지, 한 뼘에 불과한 거리일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기에 놀랍기까지 했다. 문화와 언어,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며 한 공간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70여년간 갈라져 만나지도 못한 채 반목만 해왔단 말인가. 그 세월이 만들어낸 이질감이란 얼마나 또 허약한 것인지, 한순간에 깨달아 버린 시민들이 평양냉면집 앞에 줄을 섰다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27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처음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물론 평화체제로 바뀌고 남북한 간 자유로운 왕래가 보장된다고 해서 개인의 힘든 일상에 당장의 큰 변화가 오지 않을 수 있다. 굴곡진 현대사의 공간을 희망의 메시지로 가득 채운다 한들 성평등이 곧바로 실현되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저임금 노동자로서 북한여성들에 대한 착취는 심화될지도 모른다. 북한여성들에 대한 남한남성들의 성적 판타지가 자본의 힘을 빌려 저열하게 구현될 우려도 있다. 정상국가란 이미지가 여전히 지배적 남성과 종속적 여성 간 결합에 기초한 가부장적 가족으로 재현되는 현실에서, 민족 간 화해가 바로 여성의 자유로 연결되지 않음을 여성들은 안다. 남성우월주의가 깨지지 않는 한 민족은 영구히 남성의 얼굴을 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는 성평등한 민주사회의 기본 전제다. 전쟁이 발발하면 여성과 아동이 최고의 피해자가 된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냉전체제와 분단사회는 기본적으로 갈등과 반목, 공포와 불신, 적대와 증오를 먹잇감으로 유지된다. 다양한 사회적 문제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되어야 할 ‘하나의 적’이 늘 상정되어 있어야 하고, 국가안보와 사회 안녕을 흔드는 어떤 것도 바로 그 적과 연결된다. ‘적의 위협이 야기하는 불안’이란 담론은 가족 안정성을 핵심적 가치로 만들고, 여성의 사적 역할을 국가안보와 연결 짓게 한다. 국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재생산의 도구, 모성의 담지자, 가정의 천사는 여성들의 숙명이 된다. 아름다움을 가꾸고 가정 내 역할을 익혀 남성들의 충실한 내조자이자 현명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 여성성의 구현이 된다.

이런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국주의적이고 보수적이며 가부장적일 수밖에 없기에 체제변혁적인 페미니스트적 사고는 늘 후순위로 밀리거나 심지어 사회불안을 조장하고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질 확률이 높다. 확고한 성별 규범에 의문을 품으면, 반사회적인 것, 반체제적인 것, 심지어 반민족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여성과 가부장적 질서에 의문을 품는 소수자들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직접적 희생양이 되기 쉽다. ‘빨갱이’라는 딱지가 ‘페미나치’ ‘종북 게이’ 등으로 변용되어 페미니스트들과 성소수자들을 비하하거나 낙인찍는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예증이다.

정전이 종전으로, 마침내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실현될 날을 상상하던 그날, 나는 한국페미니즘의 선구자이자 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창시자인 이효재 선생님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분단·냉전·군사독재 체제가 결합되어 독특한 한국여성의 위치가 구성되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사회학자, 여성학자, 여성운동가다.

선생님은 식민지 지배로 야기된 분단구조와 가부장제의 전통 위에 유지되는 자본주의 성장으로, 대한민국 여성은 이중삼중의 희생을 강요당해 왔다고 강조하셨다. 사상의 자유를 억누르고 사회적 보수성을 강요하는 반공분단체제는 필연적으로 여성(성)에 대한 의식뿐 아니라 남성문화 자체를 왜곡시킨다. 이에 여성은 가족 안의 종속적 역할로 한정되거나, 값싼 임금노동자 혹은 성적 착취의 대상이 되어, 인간으로서 동등한 권리마저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사회 모든 차원에서 성평등 구현 없이 민주사회 건설은 난망하다고 보셨기에, 분단 극복은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되, 필수조건이라고 하셨다. 분단체제와 성차별적 구조는 상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선생님이 소망하신 바, 평화체제를 구현할 역사적 주체로서 여성이 제대로 자리매김되어야 할 때다.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활공동체 실현을 위해 남북한 시민들의 변혁적 연대를 일구어낼 때다. 그들이 노래하는 벗, 동지, 우정에 여성이 부재하며, 화해와 용서의 내용에 여성에게 자행된 잔인한 폭력의 과거사가 포함되지 않을 때, 민족공동체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며 평화공동체는 허상이라는 사실 또한 끈질기게 일깨워야 한다. 평화의 대로에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들이 동등한 인격체로 나란히 걷게 될 날이 더 멀어지지 않도록.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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