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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가실 줄 모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왜 인문학에 대한 갈망이 그렇게 강해졌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대답하곤 한다. 20대 초반, 혹은 대학생이었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인 행동 아니겠느냐고. 한마디로 지금처럼 속물이지 않았을 때의 지성과 감성을 안타깝게 그리워하는 것, 달리 말한다면 계속 속물로 타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30대에서부터 50대까지의 내면을 지배하는 인문학 열풍은 전혀 이해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속물은 모든 것을 이해관계로 재단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돌아보라! 회사 초년병에서부터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속물이 많은가. 이런 경향은 이해, 즉 이득과 손해를 유일한 가치 평가 기준으로 밀어붙이는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이해에 밝은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고 인정되는 기묘한 편견이 삶의 진실이라도 되는양 횡행하고 있기까지 한다. 그 결과 아름다움과 추함, 진실과 허위, 사랑과 미움, 아니면 정의와 부정의 등 다른 가치는 모욕받고 멸시된다.

속물은 전세 대신 월세를 받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당당히 읊조리지만, 그 결과 세입자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해지는지 고민하지는 않는다. 속물은 학연과 지연을 자신이 가진 당연한 자산이라고 떠벌리지만, 그것이 다수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의식을 안겨준다는 걸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속물은 자식을 위해 노력하며 그걸 사랑이라고 믿지만,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치장하려는 자기 사랑이라는 걸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속물은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목소리에 핏대를 세우지만, 이웃들과 후손들의 삶에는 기꺼이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라는 가치는 항상 문화 콘텐츠나 혹은 자신을 미화하는 화장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한류니 창조경제니 하는 사생아적 개념의 탄생, 혹은 인문학적 가치들에 대한 모독은 바로 이럴 때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돌아보라! 대학시절 우리는 어떤 가치를 품고 살았는지. 이익보다는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지 않았는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료나 기성 세대들을 조롱하지 않았는가. 인문학은 속물로 살지 않겠다는, 혹은 사적인 이해를 초월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 ‘속물’ 양성소가 되어버린 대학
그러나, 14학번이여 보여주어라
이익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여기서 잠시 키에르케고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Stadier paa Livets vei)>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엄청난 노력으로 보석을 정확히 감별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보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그는 보석인지, 흔한 돌인지 구별하지 않고 행복하게 놀고 있는 어떤 꼬맹이를 보고 경악하게 된다. 이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 보석상은 귀한 것과 흔한 것이란 절대적인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광경을 보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구분 없이 돌을 가지고 행복하게 노는 아이를 볼 때, 그는 자신이 천박하다고 느끼며 이 경악스러운 광경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보석상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다. 귀한 돌인지 아니면 흔한 돌인지가 중요하지 않게 되면, 그는 직업을 잃을 것이다. 보석상이란 직업을 얻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생각해보라.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보다는 어느 아이의 행복에 몰입할 수 있는 감수성은 아직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해 보석상은 지금껏 망각하고 있던 행복을 되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석상이 되기 전, 그도 분명 어린아이일 때가 있었을 것이고, 당시 그도 지금 보고 있는 아이처럼 행복을 만끽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오로지 이해관계에 빠져버린 철저한 속물이 되어버렸다면, 그는 아이의 행복한 놀이를 무시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이에게 진지한 얼굴로 가르침을 전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 돌은 비싼 거니, 남에게 주지 말아라. 그리고 네가 들고 있는 그 예쁜 돌은 흔한 돌이니 아무한테나 줘도 된다.” 아마 아이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보석상을 쳐다보게 될 테지만. 불행히도 구제불능의 속물에다가 허영심의 노예였다면, 그는 아이를 야단쳐서 돌들의 가치를 강제로 주입하고는 아이의 행복을 산산이 짓밟아버릴 것이다. 행복에 젖은 채 놀이에 몰입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니 속물로 변해버린 자신을 반성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보석상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보석상과 같은 어른을 발견하기는 너무나 힘든 일이다.

인문학적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자신과 같은 그런 사람을 만들 것이고, 속물은 자기와 같은 속물을 만들 것이다. 지금 학교는 속물 양산의 기계로 변한 지 오래다. 부모도, 선생도, 그리고 사회도 한 목소리로 이익이라는 자본주의 가치를 우리 아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심지어 지성의 산실이라는 대학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독립적이기 힘들었던 중·고등학교 시절, 외부에서 강요된 가치를 거부한다는 건 수월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대학시절에서마저 이익과 해로움만이 유일한 가치 기준이라는 걸 수용한다면, 우리 젊은이들에게 행복은 그만큼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익 이외에, 아름다움, 진실, 사랑 그리고 정의라는 더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걸 배울 수 있는 제도적으로 주어진 거의 유일한 기회를 놓지 말고 꽉 잡아야 한다.

아무리 속물이 되어버린 선배들이 대학교를 이익이나 따지는 보석상 양성소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대학생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기성세대들이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익 이외에 다른 숭고한 가치가 있다는 걸 삶으로 그리고 열정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아름다움에 젖어들고, 진실을 숙고하고, 사랑에 온몸을 던지며,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젊은이가 적어질수록 우리 미래는 어려울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기는커녕 무거운 짐을 지도록 하는 어느 선배의 노파심을 이해주기를. 14학번 파이팅!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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