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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나
민주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성취는 왜
나라마다 다른가.
누군가 필자에게 묻는다면, 크게 보아 그러한
차이는 조직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의
존재 내지 그 영향력과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대체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의 영향력이 클수록 투표율이 높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작다. 빈곤율도 낮으며, 소비사회로 경도되는 정도도 덜하다.
사회가 성장과 경쟁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몰리는 정도가 작고, 폭력의 정도나 범죄율이 낮다.
경험적 근거로 뒷받침하기는 어려운 일이긴 하나, 문화적으로도 풍요롭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반대로, 노동의 이익을 조직하려는 노력이 이념적으로 공격받고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가 정치적으로도 과소대표될 때 그 나라의 민주주의 질은 낮고, 공동체적 관념은 취약하며,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토양 역시 척박해진다. 사회의 중요한 집단이익이 배제됨 없이 폭넓게 대표되는 조건 위에서만 민주주의는 사회를 보다 넓은 공동체적 기반 위에서 통합하는 결정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노동은 가장 크고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다. 따라서 그들을 배제하려면 정상적인 방법과 합리적 범위를 넘어서게 되고 그 경우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배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의 참여와 그에 기반을 둔 강력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심 문제 중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른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일컬어지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경로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남북한이 지리적으로뿐 아니라
이념적으로 분단되어 있는 조건에서, 진보적 이념정당의 대중적 발전은 과연 허용될 수 있을까. 일본의 경우 40년 이상 0.5당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던 사회당도 붕괴, 소멸되었는데 과연 한국이 ’미국적 범위‘를 벗어나 유럽적 경로를 가질 수 있을까.
오랫동안 강력한 사회주의 이념정당을 가진 이탈리아에서마저 진보정당 있는 정당체제가 붕괴되었는데, 과연
한국의 진보정당이 때 늦게 등장해 때이른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부과하는 시련을 넘어 유력한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립셋이 유럽 역시 미국화되고
있다며 더 이상 미국은 예외가 아니라고 하는 마당에, 과연 한국은 그런 경향을 거슬러 올라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의 중요성
이상의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강력한 국가의 존재, 재벌과 주류언론이 중심이 된 강력한 거대사익들의 기득체제, 분단과 전쟁의 경험이 불러들이는 강력한 이념적 제약 등 한국에서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요인은 대개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토대를 갖는다.
하지만 제약 요인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현실이라고 비약할 수는 없다. 각자가 지향하는 정치학의 계보나 퍼스펙티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정치학의 근본적 강점은 그 어떤 결정론적 사고에도 식민화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에 어쩔 수 없다거나, 남북한의 분단을 먼저 극복해야만 진보정치가 열릴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외재적 환원론은 근본적으로 미국 예외주의적 접근(즉, 다른 나라와 다른 미국적 예외에서 그 원인을 찾는 접근)의 한국판일
뿐이다.
문제는 여러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개척해갈 수 있을 정도로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유능한가
하는 데 있다. 사회학자 중의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는 막스
베버는 정치에 대한 소명이 있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진보정치의 영역에서 우리가 목격한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진보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바
크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지지할 사회적 기반과 유권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로부터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
본다.
대다수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와 대중정치를
이해하고 적응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신들이 견지했던 이념의 언어로 현실을 재단하고 대중을 계도하려는 태도가 강했다. 권력과 권위, 갈등과 대립,
리더십과 통치의 기능을 부정하면서 일종의 정치의 현실을 초월한 도덕적, 급진적 운동론으로 정치조직의 통합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대중정치에 적응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진보정당의 대중적 발전에서 매우 중대하고도 핵심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운동과 정치
운동으로서 진보세력이 정치 영역에 참여한다는 것의 가장 이상적인 내용은,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하여 가난한 서민대중의 삶의 현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핵심은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한다는 것’ 내지 이른바 ‘정치의 방법’에 대한 문제이다.
정치의 방법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학의 기본 전제는, 정치란 개인의 차원 나아가 운동성 내지 도덕성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세계를 갖는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초심’, ‘도덕성’, ‘운동성’과 같은 도덕률이 진보의 영역에서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접근은 무엇보다도
정치를 현실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정치의 현실이 포착되지 않는 조건에서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도덕성은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강제될 수 없는
것이다. 도덕성이 정치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준이 될수록 정치가
도덕적일 수 있는 기반은 파괴된다. 우리사회처럼 도덕성이 강조되는 정치도 없지만 한국정치가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은, 한국의
정치가가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성을 따지는 동안 실제 개선해야 할 정치의 현실을 놓쳐버리고 결과적으로 부도덕한 정치 현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에서 자주 사용되는 ‘의식개혁’
내지 ‘의식화’라는 접근도 마찬가지이다. 기실 사람의 의식과 내면세계를 뜯어고치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태도이지만, 개개인의 의식을 문제
삼는 동안 정작 문제가 되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은 건재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가는 교체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유사한 의식과
관행이 반복되는 정치구조는 변함이 없게 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정치가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은, 도덕성을 따지는 동안
실제 개선해야 할 정치의 현실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 정치의 체계와 구조를 좋게 만드는 것만이 시민사회 내지 생활세계의
도덕적 기반을 널리 확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이 들어오지 않는 한 운동이 민주정치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근대
정치학은 도덕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했다. 달리 말하면,
가난한 대중의 운명이 정치가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반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접근이라 하겠다.
아무리 선한
정치엘리트나 그 어떤 민중적 교리를 갖는 정당도 대중의 요구에 의해 제약되는 정치의 체계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도덕적 헌신은 무뎌지고
편협한 조직의 관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이상적 민주주의라 해도, 민주주의 역시 지배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가 운동권 내지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갖는 가장 큰 불만은, 분명 그들 역시 정치를 하고 권력을 이용하고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다투고 있는데도 늘 언어의 구사에
있어서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를 권력과 이해관계에 초연한 역사적 역할자로 정의하거나, 자신은 안 그런데 상대가 권력과 이해관계를 다툰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또
자신은 원치 않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권력과 이해를 다투게 되었다는 식의 자기 위선과 변명의 문법이 일상화되었다.
진보정치도 정치인 한 권력과 이해관계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언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진보파의 언어가 정치 행위의 실제를 반영하지 못할 때, 대개 언어로 이루어지는 민주정치의 현실에서 다수의 신뢰를 조직해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진보세력의 매우 초라한 정치적 성과 내지 주변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정치의 현실을 다룰 언어가 없다면, 갈등을 합리적으로 다룰 수 없고, 기껏 누가 더 도덕적으로 규탄
받아야 하는가를 따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질 때는 상호 자기파멸적 효과를 가져 올 것이기에 은밀한 방법과 보이지 않는
배타성 내지 내부자라면 누구나 이를 감지할 수 있는 집단적 분위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는 컸다. 진보정치의 영역 내부에서 갈등과 균열이 생길 때마다 도덕주의적인 집단 선택이 강요되고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사회적 기반을 끊임없이 축소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지 않는 한 진보정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시도들이 앞으로도 다른 결과를 가져오긴 어려워 보인다.
정치와 정당
대규모 정치공동체를 움직여야 하는 이상, 체계와 조직이 필요하고, 그만큼 기능과 역할에 따른 위계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가 없는 민주주의는 없으며, 본래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국가의 한 형태로 정의되고 개념화된 것이다. 물론 국가 없는 사회를 구상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히 말해 그것은 민주주의를 넘어선 차원의 이슈이다.
불평등의 원리로 조직된 시장메커니즘이 생산적 자원의 분배와 할당을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화의 가장 강력한 기제는 민주주의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조직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치와 국가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현실의 불평등체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쉽다.
정당 혹은 당파성의 문제도 그렇다.
현대 민주주의는 선거를 제도적 채널로 하는 정치적 대표의 체제를
그 핵심으로 한다. 로베르토 미헬스가 강조했듯이, 이는 불가피하게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엘리트들의 과두체제 혹은 이들로 이루어진 정당들 간의
과두체제를 발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민주주의의 현대적
유형이라 부르고, 나아가서는 고대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고 더 실천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회 갈등의 정치적 대표와 경쟁의 원리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 엘리트와 정부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으로 조직된 복수의 정치적 대안들이 존재해야 하고 이들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가 일종의 물리학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 사회의 균열기반 위에 위치한 여러 집단들의 이익과 열정을 복수의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동원하여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는 파당적 경쟁의 효과가 작용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시장의 분배구조에서 소외되어 있는 약자들의 요구가 국가의 정책결정에 반영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념과 리더십 그리고 규율
사회경제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은 ‘지금 있는 현실’의 힘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지만, 다수의 형성이라는 민주적 방법을 통해 불평등 구조를 개선해가고자 하는 진보세력의 경우 대안적 이념은 ‘지금의 현실이 개혁된 내일의 현실’을 추상적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
현상유지를 바라는 집단이야 현재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족하지만 현실의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세력의 눈은 불가피하게 미래에 두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대규모 집합행동을 이끌고자 하는 진보세력에게 ‘확신의 딜레마’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합리적 선택이론에 기초한 정당론을 개척한 앤소니 다운즈가 정당의 세계에서 이념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정당들이 발전시키고자 하는 이념을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합리적 기제 내지 지름길(shortcut)이라고 정의했다. 불행하게도 그간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제대로 된 강령 하나 작성하지 못하고 추상적 공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제 아무리 현실적인 내용과 체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념만으로 정당조직이
직면하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정당론에 대한 ‘최후의 패러다임’을 개척한 안젤로 파네비안코가
강조하듯, 리더십의 발전
없이 정당조직을 통합할 방법은 없다. 거대한 규모의 정치조직을 제도나 추상적인 규칙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현실이 아니다.
정치란 폭군이나 독재자의 출현가능성을
감수하고도 인간이 사회를 조직하고 통합하는 불가피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정치 없이 시민적 삶을 발전시키기는 불가능하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의 핵심은 좋은 통치자를 만드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정당을
‘현대판 군주’(modern prince)라고 지칭했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강조했듯이, 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정치에서 정당은 곧 국가의 통치권을
두고 경합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조직적 표현과 같은 것이다.
응당 조직으로서의 정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완화시키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념이 필요하고, 자연스럽게 리더십의 발전 및 조직적 권위의 확립, 규율의 체계화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정당의 모델을 말하면서 막연히 ‘대중적’인 어떤 정당조직을 연상하곤 한다.
그러나 19세기 이래 서구민주주의를 이끈 대중정당은 매우 응집적인 이념정당이었으며, ‘민주집중제’라고 불리는 강한 리더십과 조직적 규율, 다양한 대중단체를 특정 방향으로 이끄는 당 활동가들의 당파적 역할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러한 정당모델을 그대로 실현할 수야 없겠지만, 그러나 그 기본 원리는 오늘날은 물론 미래에도 부정될 수 없다.
결국 핵심은 권위, 권력, 국가, 정당, 당파성, 리더십의 좋은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있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정치 자체를 없애버리는 접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우리사회의 진보파와 개혁파들이 반정치, 반국가, 반권위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의 공세로부터 민주 정치를 얼마나 지켜냈는지 회의적이다.
모두가 나서서 민주화이후의 정치를 부패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사이, 반정치와 투명성, 효율성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치관과의 접합은 훨씬 강화되었다.
정치는 쉽게 회계학의 원리에 따라 교정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고,
대중 속에서의 정치활동 역시 부패 가능성을 이유로 부정시되고 구태라고 비판되었으며, 방송매체를 활용한 정책토론회 등 대중과 유리된 정치가
무비판적으로 강조되었다.
사회적 갈등구조를 초월하여 주류언론-재벌-검찰-시민운동-주류학계를 묶는 광범한 ‘정치개혁 담론동맹’이 맹위를 떨치는 사이 민주정치와 정당정치는 점점 사회적 기반을 상실해 갔다. 급기야 세계에서 가장 투표하기 쉬운 나라라 할 수 있는 한국에서 총선투표율이 46%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당내 민주주의의 문제
모든 정당이 당내 민주화를 말해왔고 지금도 계속 그 패러다임 안에 있다. 문제는 당내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좋은 정당이 되기 위해 당연히 발전시켜야 할 리더십과 이념, 적절한 조직규율 등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데 기여해왔다는 사실이다.
정당은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답은 ‘아니다’이다.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하는 것은 정당체제이지
정당이 아니다. 민주정치의 핵심은 개별 단위(unit)로서 하나의
정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들 즉 단위들 사이의 관계양식을 말하는 정당들의 체계(system)에 있기
때문이다.
단위로서의 정당은 기본적으로 자율적 결사체의 성격을 갖는다. 어떤 정당은 자신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위계적인 조직구조를 가질 수도 있고, 이념을 중시하며 상층 엘리트 사이의 집단지도체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가능한 민주적 가치와 원리가 당내에서 발전해야겠지만 그것이 조직으로서의 정당 내지 리더십의 발전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물신화하는 일이 된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민중을 위한 것이며, 거꾸로 민중이 그러한 이념적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당 역시 추상화된 원리나 가치에 맹목적으로 종속되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들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당내 정파는 한국 사회 진보파를 괴롭혀 왔던 대표적인 문제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정파의 존재 때문에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파의 존재와 이들 사이의 경쟁이 당내 활력과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파의 문제를 그렇게 다루지 못한 데 있었다.
막스 베버는 ‘지도자가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권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파와 붕당이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 진보정치의 현실이 정확히 베버의 말과 같게 되었다고
본다. 2004년 원내 진입과 함께 어렵게 만들어진 진보의 정치적 자원이 탕진된 것은, 정파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부의 부재로 인해 정파의
폐해가 무제한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직화와 리더십에 부정적인 정향은 대개의
경우, 개인적으로 발언권을 더 크게 가질 수 있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지도부 등장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중산층 엘리트들의 욕구를 반영한다.
강력한 리더십의 체계가 작동할 때 이들의 욕구는 조직 내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지만, 반대로 리더십의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 정치조직의 파편화 내지 정파의 과도한 족출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된다.
진보적 관점을 담은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학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한 정당의 부재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축소하고 선거를 중간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
이 간단하면서도 단호한 주장이야말로
현대 정치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중과 대표를 연결하는 수직적 책임성(vertical accountability)이고, 이는 이념과 집단, 조직 등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겠지만 구체적 인물과 지도자를 초점으로 한 직접적 대표성(direct representation)의 원리에 의해서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은 정치적으로 더 강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적 요구를 구체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리더십 형성이 시급하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사례로 볼 수 있듯,
한국의 진보정당은 개인으로 상징되는
리더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정당조직 모델을 고집했다.
아마도 이 점은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 사례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진보정당이 갖는 자원과 잠재력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빈약한 성과로 나타났다. 정당이 하나의 조직인 한, 그것도 사회의 개혁자가
되고자 하는 진보정당인 한, 리더십의 문제를 경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실의 민주주의가 먼저 정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한 뒤 그것에 책임성을 묻듯이, 정당조직에서도 중요한
건 먼저 리더십이 기능하게 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권위주의적 요소들과 대면해가야 할 것이다. 인치(人治)가 갖는 독단성과
임의성을 제어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인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정치를 없애는 것과 같다.
그간 한국의 진보정당은 보수정당과는 달리
‘인치의 과잉’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대와 대중적 열망을 응집시킬 수 있는 ‘인치의 부족’ 즉 리더의 부재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낳았다. 아데나워 시대의 독일기민당, 브란트 시대의 독일사민당, 맥도날드 시대의 영국노동당, 미테랑 시대의 프랑스 사회당, 베를링게르 시대의
이태리 공산당을 말하듯, 진보정당도 리더십의 특징과 결합된 직접적 책임성의 구조를 발전시키는 데 소극적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제임스
매디슨이 강조했듯이, 인간이 천사라면 통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 천사가 통치한다면 책임성을 부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인간의 현실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고 통치도 필요하며, 권력과 권위의 부여도 불가피하다. 먼저 리더가 조직을 통치할 수 있게 한 뒤에 그 결과에 사후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가는 것 없이 어느 조직도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야말로 리더가 조직을 통치하기도 전에 과도한 견제부터 하면서 조직을 통치 불능으로 만들어 온 우리사회의 진보파들에게
가장 부족한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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