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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영화 <뒷담화> 시사회를 봤다. 감독이 현장에 있지 않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원격으로 촬영 지휘를 해서 만든 ‘실험 영화’였다. 이런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 영화만 놓고 이야기한다면, 세 가지 정도로 영화라는 예술장르에 대한 중요한 성찰을 던져주는 작품이었다. 컴퓨터그래픽 영화의 등장 이후에 망각되었던 감독의 지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매끈한 인공의 형식을 만들어내기 위한 거친 노동의 현실, 그리고 감독의 입장에서 ‘컷’이라고 외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카메라에 담긴 것보다 더 나은 장면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 실패의 기록이 <뒷담화>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래 <십분 만에 사랑에 빠지는 방법>이라는 단편 제작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뒷담화>는 제목 그대로 배우와 스태프들이 내뱉는 생생한 ‘뒷담화’를 담고 있다. 여기까지 본다면, 좀 특별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지만, 영화 바깥의 문제와 이 내용을 연결시킨다면 범상하지 않은 주제의식이 도드라진다. 제작 초기에 아이디어를 공유했다는 지인의 전언에 따르면, <뒷담화>는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감독이라는 ‘리더’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지, 영화는 입체적인 시각으로 이 문제를 파고들어가고 있다.
‘뒷담화’는 그러므로 리더십의 부재 상황에서 기획을 완수하기 위한 특정 집단의 소통행위이기도 하다. 권력의 정점인 ‘리더’가 현장을 통솔할 때 꿈꿀 수 없었던 자발적인 아이디어 회의가 바로 ‘뒷담화’인 셈이다. 이 과정에서 리더십을 전복하는 일도 벌어진다. 이런 원리를 정치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롭게 출범할 박근혜 정부의 인선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발표된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향후 국정운영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을 하게 된다.
박근혜 당선인이 발휘할 리더십의 윤곽을 인선 결과에서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모양새는 아무래도 영화 <뒷담화>가 제기하고 있는 자발성에 기초한 리더십과 사뭇 다른 것처럼 보인다. 행정실무형 위주로 내각의 진용을 구축했다는 것은 명령의 계통을 확고하게 다듬어서 일의 처리를 원활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서로 다른 부처가 각자의 아이디어에 기반을 두어서 창조성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으로 권력이 집중하는 한국형 민주주의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제를 보완할 리더십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국회 찾은 박 당선인 (경향신문DB)
러시아계 영국 사상가인 이사야 벌린은 리더십을 크게 여우형과 고슴도치형으로 나누었는데, 전자는 가치에 대해 개방적이고 후자는 하나의 가치만을 신봉하는 성격을 가졌다. 여우형 인간은 하나의 문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이것저것 심사숙고해서 결정하기 때문에 우유부단하게 보일 수 있지만, 고슴도치형 인간은 신속하게 결정해서 한 방향으로 기획을 밀고 나가는 성격이다. 당연히 여러 가능성을 두고 판단을 내리는 여우형보다도 하나의 방향을 정해놓고 모든 가치를 집중시키는 고슴도치형이 추진력의 측면에서 훨씬 나을 수 있겠지만, 또한 그만큼 실패할 경우에 방향을 바꾸는 것이 여우형보다 용이하지 않다.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정책을 실행에 옮길 때, 얼마나 오류를 줄일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이다. 특히 대통령처럼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경우는 더욱 이 가능성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토대로 전문가들은 다양한 가치를 향해 열려 있는 여우형 리더십이 고슴도치형 리더십보다 훨씬 더 유연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위험이 적다고 주장한다. 일처리에서 더디더라도 개선의 여지가 많다는 의미다. 두 리더십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는 권력을 운용하는 당사자의 몫일지도 모른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은 ‘불도저’라는 닉네임으로 불릴 정도로 고슴도치형 리더십을 대표했다는 생각이다. 그 결과 임기말에 이르러 온갖 자화자찬을 쏟아내고 있는 광경과 반대로 여론은 결코 그의 리더십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차기 정부가 어떤 리더십을 통해 운영될지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또한 벌린이 제시한 두 가지 리더십의 유형이 적절하게 모든 현실의 권력 작동을 설명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론은 이론이고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기 정부를 위한 인선과 전략 과제 설정은 리더십에 대한 고민 없이 불가능하다. 이명박 정부의 경우처럼, 모든 것을 결정하기 위해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갑갑한 리더십으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여성’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부드러운 리더십’이 어떻게 박근혜 정부에서 구현될 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이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성취한 개방성을 대통령의 리더십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험이 차기 정부에 보내는 엄중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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