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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이루어진 첫 대국민담화는 지금 현재 처해 있는 한국 정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분노의 담화문’에 담긴 내용은 협조하지 않는 야당에 대한 질타로 채워졌다. 답답한 대통령의 심정에 일말 동정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야 협상’이라는 과정에 대해 싸잡아 ‘발목잡기’라고 판단해버린 일도양단은 성급했다는 생각이다. 


교과서에서 배우기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요체는 행정, 사법, 의회라는 삼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이다. 한국 사회는 경위야 어떻든 영미식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고, 독재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정치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국민을 대의하는 의회와 국민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 공존하는 민주주의 방식은 자유민주주의의 한국화에서 드러난 문제들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의 담화는 이런 측면에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것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의회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국민의 열망’을 표현하고자 한 적이 있다. 대불공단에서 전봇대를 뽑은 일이나, 아동성범죄 해결에 미온적인 고양서를 방문한 조처가 여기에 해당했다.


(경향신문DB)


따라서 박 대통령의 담화는 그 내용보다도 이런 행위의 측면 때문에 한국 정치의 현실을 보여준다.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협상을 ‘쓸데없는 소란’으로 치부하고, 정치 자체를 ‘병균’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박 대통령의 담화는 이렇게 이미 존재하는 논리를 격한 어조에 담아냈을 뿐이겠지만, 이 풍경 자체를 놓고 본다면, 지난 선거를 통과하면서 목격했던 대의정치의 위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안철수 현상’을 불러온 대의정치의 위기는 ‘여의도 게토화’라는 현실로 표면화됐다. 정치인이 여의도 바깥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인식의 함몰현상이 ‘여의도 게토화’의 원인일 것이다. 정치인 자체를 이익집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하게 정치혐오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인 결과다. 안철수 전 교수가 정계복귀를 선언하는 명분도 이것이다. 이번 보궐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밝히면서 내세운 이유는 “한심한 정치상황”이었다.


대선 패배라는 쓴잔을 마신 민주당은 여전히 계파투쟁에 휘말려 전당대회 날짜를 결정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개탄을 온몸에 받고 있다. 새누리당도 이런 비판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의 담화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원인도 지금 개점휴업 상태인 새누리당이 일부 제공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의회정치를 협상력으로 이끌어내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샅바싸움으로 외부에 비치게 만든 안이함도 되짚어 봐야 한다.


이처럼 기존에 진보와 보수를 구성했던 정치세력이 변별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까닭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정치혁신에 대한 의지일 것이다. 지난 대선을 지배했던 화두는 단연 ‘새 정치’였다. 유권자가 박근혜 정부를 지지한 까닭도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보여준 혁신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선된 뒤에 드러난 진실은 이런 기대에 반하는 결과였다.


박근혜 정부를 지지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직 기대를 접기에 이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볼멘소리를 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우려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지난 대선에서 이미 해결됐다고 생각했던 정치혁신의 과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의회가 직접 대결하는 양상은 포퓰리즘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시각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혁신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안 전 교수의 출마는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서 가능하다. 기성 정치권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내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안 전 교수의 자리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대선이 끝났음에도 그 이전의 상황이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그 원인은 의회정치를 복원해내지 못하고,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는 정치인들이다.


아무리 수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다. 민주주의에 내재한 절차라는 형식성을 무시한다면, 정치인들의 명분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안 전 교수의 출마가 이런 명분을 되살리는 것이 될지, 정치를 더 혼란에 빠트리게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기성 정치의 위기라는 것이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의 의사로부터 유리돼서 초래된 결과라는 사실이다. 결국 정치의 재현성을 다시 살려내는 것, 그것만이 박근혜 정부의 실패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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