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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마석 모란공원을 안내할 일이 있어 다녀왔다. 종종 마석 모란공원을 안내할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곤혹스러운 일은 소개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문익환, 박종철 열사 등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분들도 있고, 김근태, 노회찬과 같은 유명 정치인들도 있고, 용산참사 때 돌아가신 철거민들도 있지만, 여기에는 전태일, 김진수, 김경숙 등 1970년대와 그 이후 돌아가신 노동열사들이 많이 모셔져 있다. 

1970년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던 전태일 열사, 그리고 아들과 한 약속을 평생 이루려던 이소선 어머님, 그리고 그 옆에 지난해 12월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의 묘가 있다. 이 묘 앞에서 지난 4월28일 조형물 제막식을 했다. 평장 형태에 흰 돌을 깔아서 마무리한 무덤 위에 자전거를 탄 노란색 조형물, 그가 평소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는 그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열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들아, 너한테 꼭 맹세할게. 꼭 해낼게, (다른 노동자들이) 너처럼 죽지 않게 이 무덤 앞에서 맹세할게.”

외아들을 잃고 장례 전에 ‘또 다른 김용균’을 막자고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을 위해 눈물로 호소하고 다녔던 엄마는 다시 다짐을 했다. 1970년 300만 노동자의 대표였던 전태일이 노동부를 찾아가 근로감독을 요청했다가 묵살당하고 자신의 몸을 불살라 처참한 노동현실을 고발했던 전태일 앞에서 그의 어머니 이소선이 약속했던 것처럼. 

그래서였을까.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말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내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가게 되었다. 누구라도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는 보편적 적용의 법 개정취지는, 그리고 위험의 외주화를 방지하겠다고 개정된 법률은 여러 가지로 부족했지만, 28년 만의 법 개정을 두고 큰 걸음을 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고용노동부가 4월22일 발표한 그 시행령안과 시행규칙안이 문제가 되고 있다. 시행령안에서는 “도급 승인의 대상 범위를 황산, 불산, 질산, 염산을 취급하는 설비를 개조·분해·해체·철거하는 작업으로 국한”하려고 한다.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작업에 대한 도급을 제한하자고 한 법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또 원청의 책임도 모호해졌고, 특수고용노동자 50개 직종 중에 9개 직종에만 적용하도록 하고, 노동자들이 작업중지권도 무력화하고 있다. 하위법령인 시행령과 시행규칙으로 법률을 무력화해온, 국회의 입법권을 무력화해온 상투적인 수법이 사람의 목숨과 관련한 법률의 시행령안과 시행규칙안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버렸다. 오히려 하위법령에서 개정 법률이 못 담았던 부분들까지 적극적으로 보장하도록 나아가면서 향후 법률 개정을 이끌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법률 조항들을 좁게 해석하고, 무력화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조문을 만들어 버리는 이 오래된 버릇이 여기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위험의 외주화 근절은 대통령의 약속이다. 노동부도 지난해 산재 사망률을 4년 안에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미흡한 산안법으로, 이리저리 기업들이 산업안전을 소홀히 할 길을 터놓은 엉터리 시행령으로 그게 가능할까? 

노동부는 “활력 있고 안전하며 든든한 일터 조성”을 기관이 미션으로 제시하고 있고, 산업안전분야에서는 “무사고, 쾌적한 일터”를 약속하고 있다. 이런 약속을 믿을 수 있을까 회의하던 터였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노동조합을 깨는 일에 국가정보원, 검찰, 검찰 등과 함께 적극성을 보여온 부처가 노동부였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노동부의 체질이 저절로 개선될 리가 없다. 

지난해 노동부가 산재 사망률을 4년 안에 절반 이하로 줄이겠다고 발표하게 된 배경은 우리 사회 산업재해의 심각성을 드러냈던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김봉환 사망 30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OECD 1위의 산재사망률을 기록하는 한국의 민낯을 개선하기는 해야겠으니 구체적인 대책 없이 구호 차원에 제시했던 것은 아닌가. 한 해 2400명이 산업현장에서 죽어나가고, 건설 노동자들만 1년에 500명이 죽어나가는, 그래서 김훈 소설가가 “목숨이 낙엽처럼” 떨어져 죽는다고 개탄한 이런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를 노동부에 기대할 수는 있을까? 

전태일과 김용균의 묘에서 능선 끝으로 올라 공원묘지의 끝단을 오른편으로 올라가 걸어가다 보면 문송면의 무덤을 만난다. 응달이라서 볕도 많이 안 드는 곳에 떼도 많이 나지 않는 낮은 무덤이 있다. 1988년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문송면은 서울 양평동의 온도계 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다가 수은중독에 걸려서 사망했다. 만 열다섯 살이었다. 문송면의 묘 대각선 건너편에는 김봉환의 무덤이 있다. 1988년 원진레이온에서 900명 넘는 다른 노동자들처럼 이황화탄소에 중독이 되었고, 죽은 뒤에도 137일 동안을 공장 정문 앞에서 버티다가 장례를 치렀다. 이들의 끔찍한 죽음을 본 뒤에야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없게 하겠다고 이 나라에서는 비로소 산업재해 추방운동이 벌어졌다. 그런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우리의 일터는 안전하지 않다. 

네 가지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설비를 다루는 작업에 대해 도급승인을 제한할 때 31년 전의 문송면과 김봉환의 작업장은 산업안전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을까? 지금의 이 법과 시행령안과 시행규칙안으로 그게 가능한지 묻고 싶다. 노동부 장관은 문송면과 김봉환의 무덤 앞에서, 김용균의 무덤 앞에서 대답할 자신이 있을까? 

기업의 이윤 앞에 알아서 기는 노동부가 아니라 노동자의 목숨을 보편적으로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부는 언제 볼 수 있을까? 이제 입법예고 기간도 끝났다. 지금의 시행령안, 시행규칙안은 당장 폐기하고 새롭게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 다시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목숨마저 이윤 앞에 내놓는, 그리고 차별하는 반인권적 입법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박래군 | 인권재단 사람 소장·4·16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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