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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대명사 연산군. <중종실록>에는 그의 죄상이 무려 4쪽에 달한다. 즉위 초에는 백성을 보살피고 국방에 주력했으나, 생모 폐비 윤씨 사건으로 온갖 폭정이 시작되었다. 꽃과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천성이었는지,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신의 지취(志趣)와 향락이 우선이었다. 그야말로 ‘풍류에 진심’인 왕이었다. 그렇다고 탄핵당한 폭군으로만 치부하긴 아쉽다. 조선시대 원예사와 공연예술에 큰 족적을 남긴 임금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임금이 꽃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연산군만은 예외였다. 그는 기이한 꽃과 나무를 구해 후원에 심도록 하고, 각종 꽃을 전국 각지에서 바치게 하였다. 또한 철 지난 감귤이라도 ‘가지에 붙어 있는 채’로 올리도록 하거나, 일본철쭉을 “뿌리에 흙을 붙인 채 바치되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명하기도 하였다.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는 매우 졸렬한 주문이라 할 수 있지만, 개인으로 보면 꽃을 지극히 사랑했던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의 하명 이후, ‘석류·치자·장미 등 모든 화초에 흙을 붙여 바치고 종류마다 수십 그루씩 계속 올리니, 지친 백성이 길에서 죽는 일까지 발생하였다’고 실록은 전한다. 어디 그뿐이랴. 연산군은 역대 임금 중 경회루를 가장 정성 들여 가꾸고 화려하게 꾸민 임금이다. 그는 경회루 방지 서쪽 인공섬에 만세산을 만들고 그 위에는 월궁 등을 지어 비단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하였다. 게다가 금은비취로 장식하고 부용향 수백 다발을 태우며 자신의 전용배인 황룡주에 올라 이 정경을 감상했다 하니 그 호화로움은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이쯤 되면 전아(典雅)한 전통 연희라기보다는 ‘21세기 초현실적 공연예술’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대단한 연출력이다. 그의 전위예술적 퍼포먼스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무렵, 그는 폐위되었다. 

백성보다는 꽃과 음주가무를 사랑하던 연산군은 결국 강화 교동도로 쫓겨나 탱자나무 울타리에 갇히는 위리안치 형벌에 처해졌다. 궁궐을 꽃 대궐로 꾸몄던 연산군이 탱자나무 가시울타리에 갇힐 줄이야. 빽빽한 탱자나무 울타리는 대낮에도 황혼 같아서, 생무덤이라 한다. 위리안치는 중국에는 없던 형벌인데, 연산군 때 처음 시행되었다. 자신이 만든 위리안치 형벌에 자신이 희생자가 되었으니, 이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그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말은 세상에 대한 회한이 아니라, 부인 신씨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융, 향년 30세.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교수>

 

 

연재 | 이선의 인물과 식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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