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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 속의 특성화고는 야구 잘하는 학교였다.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등 봄부터 펼쳐지는 전국 고등학교 야구대회에서 박노준·김건우의 ‘선린상고’,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부산·대구·광주의 야구 명문 ‘부산상고’ ‘대구상고’ ‘광주상고’ 등은 주말 TV 스포츠중계에서 자주 보던 전통의 강호였다. 또 하나의 기억은 ‘가난한 집 똑똑한 효자(효녀)’들이 다니던 곳이다. 특성화고는 실력이 높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일찍 생계를 꾸려야 하는 ‘기둥’들의 배움터였다.

실제로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졸업장이 아닌 성실함으로 이룬 특성화고 출신들의 성공 신화는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고졸 신화’의 대표 격이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살 정도로 가세가 어려웠던 그는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원 생활을 했다. 낮엔 일하고 밤엔 야간대학을 다니며 공부해 25세에 행정고시를 패스했다. 명문고,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수두룩한 경제기획원에서 그는 철저한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첫 대법관인 조재연 변호사도, 청와대 일자리수석비서관인 반장식 전 기획예산처 차관도 덕수상고 졸업생이다. LG전자 조성진 부회장은 용산공고를 졸업하고 견습사원으로 시작해 지금은 LG전자의 ‘원톱’ 최고경영자(CEO)다. 사내에서 ‘세탁기 박사’로 불리며 잇따라 히트 상품을 내놨다.

그러나 이 같은 ‘고졸 신화’는 그야말로 신화처럼 아스라이 옛일이 되고 있다. 오히려 지금 특성화고 학생들은 제대로 꽃피지도 못한 채 다치고 부러지다 심지어 죽음을 맞기도 한다.

지난해 5월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숨진 김모군(당시 19세)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거리며 대책을 마련했지만 제2, 제3의 김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9일 제주의 한 특성화고 졸업반 이민호군(18)은 생수 공장에서 현장실습 중 사고로 크게 다쳐 10일 만에 숨졌다. 전주에 있는 LG유플러스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홍모양은 “아빠, 나 콜 수 못 채웠어”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목포의 한 특성화고 3학년 박모군도 보일러 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다 오른발 엄지와 검지가 절단됐다. 전공과 상관없는 부서에 배치돼 저임금을 받으며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주당 7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사고가 나면 어른들은 책임을 떠넘기는 데 급급해했다.

더 슬픈 것은 이런 위험 속에서 몸 성히 졸업하고 취업을 한다고 해도 이들에게 더 나은 기회가 펼쳐지는 세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돈보다 생명이 중요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교훈은 ‘수저계급론’에 밀려 이제 교실 안에서도 인정받기 힘든 상황이 됐다. 통계상 고졸 임금생활자의 월평균 임금(231만원)은 대졸자(362만원)보다 131만원 적다. 시간이 흘러도 고졸 취업자의 저임금은 개선되지 않고, 고졸이라는 차별과 사회적 편견에 마음이 찢기고 부서질 가능성이 높다. “특성화고 학생·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무시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이들이 만든 권리장전에는 처절함이 녹아 있다.

그러나 정작 차별과 무시는 공정함이란 외피까지 두르며 점점 노골화하고 있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데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고 반대한다. 정작 공공기관 채용은 비리로 얼룩져 있었다. 정부가 공공기관 채용 과정을 전수조사한 결과 275개 공공기관의 최근 5년간 채용비리가 무려 2234건이었다. 이들이 뽑고 싶었던 사람들은 아버지에 달렸을 것이다.

대표적 금수저인 재벌가 3세들은 올해도 초고속 승진을 이어갔다. 정기선 현대중공업 전무(35)는 현대중공업 부사장 겸 현대글로벌서비스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27세 때인 2009년 현대중공업에 대리로 입사한 지 8년 만이다. CJ그룹 이재현 회장의 큰딸 이경후씨(33)는 2011년 입사한 지 6년 만에 상무로 승진했다. 이 상무의 남편인 정종환 CJ 미국지역본부 공동본부장(37)도 함께 상무가 됐다. 한국타이어, 코오롱 등의 3세들도 마찬가지다. 노력에 의한 계층 상승의 길이 막혀 있는 사회에서 재벌·학벌·지역 등의 기준이 서열을 낳고 차별을 잉태하고 있다.

곳곳이 ‘세월호’이고, ‘구의역’이다. 소중한 아이들의 생명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이라도 “7시30분에 출근해서 6시 퇴근인데 나 혼자 10시30분 퇴근” “너무 더워 살려줘”라며 SOS를 보내는 학생들을 우리 사회는 온전히 구할 수 있을까. 차별과 서열, 불평등이 고착화한 사회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이군에 대한 미안함을 감당할 수 없다.

<박재현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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